
로버트 게로치 지음, 김재영 옮김, 《로버트 게로치 교수의 물리학 강의》, 휴머니스트, 2003.
원서의 제목은 'General Relativity from A to B by Robert GEROCH'이다. 원서의 제목이 암시하듯, 물리학 등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상대성이론의 대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 책이다. 중간중간 숫자 계산은 나오지만 특별히 어려운 수식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은 만물이 존재하는 기본 조건이 된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무대나 배경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캔버스가 필요하듯이, 우리의 삶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펼쳐진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런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 이미지를 갖게 한다. 하나는 '넓음'이다. 공간과 시간은 넓은 영역, 혹은 모든 영역의 활동의 토대가 된다. 두 번째는 '불변'이다. 공간과 시간은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가 바꾸거나 만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고 지금 이 모습처럼 존재해 왔다. 이 두 가지 이미지는 마치 공기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그것은 지구 상의 모든 영역에 퍼져 있고, 생명 활동의 배경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변경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의 보편성에서 벗어나서 이를 매우 특수한 현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표현 대신 '시공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공간과 시간'이 만물의 배경이라면, '시공간'은 매우 특이한 특성을 갖는 물리적 대상이다. 시공간은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한다. 질량이 큰 물체 근처에서는 공간은 늘어나고 시간은 느려진다. 질량이 엄창나게 큰 물체 곁에 있다면 시간은 외부인이 보기에 거의 정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공간에 대한 상대성이론의 이러한 설명들은 시공간이 사실은 매우 특수한 물리적 대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인간 인식의 토대를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격하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빅뱅에 관한 이야기들과 결합하면, 이렇게 특이한 시공간이 어느 순간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사뭇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용암 분출로 어떤 특정한 모습의 화산이 만들어지듯이, 빅뱅을 통해서 지금과 같은 특성을 갖는 시공간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다른 우주가 있다면, 그 우주의 시공간은 우리의 우주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다른 행성들을 조사해보니, 지구 상에서는 보편적이라고 여겨졌던 공기의 존재가 사실은 매우 희소하고 특수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행성 위에서 우리를 포함한 생명체들이 이렇게 숨을 쉬고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매우 특별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공간과 시간이 펼쳐져 있는 우주에 속한 것도 사실은 매우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것을 특수한 것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창의적인 -즉 문제 해결 능력을 높여주는- 경험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모국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또한 역사를 배우면서 당대를 특수한 상황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오후 4시 좀 넘은 시간에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는 모습을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특이하고 특수한 사회인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대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내고 평소에 가졌던 의구심들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한다.
상대성이론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평소에 삶에 대해 느꼈던 순간순간의 의문들에 대해 상당성이론은 나름 참고할 만한 대답을 준다. 다만, 그 대답이 나를 더 심연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시간의 흐름이 꽤나 불합리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과거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선명한데 반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삶의 영역의 크기와 변화의 정도는 나의 어린 시절의 예상보다도 너무 크다. 이는 과거의 기억에 견주어 현실을 낯설게 느껴지게 만든다. 때로는 현실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부적응은 '왜 시간은 이렇게도 강압적으로, 그리고 강박적으로 흘러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에 대해 상대성이론은 내가 그러한 시공간적 특성을 가진 우주에 속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우주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찰나의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준다. 즉, 우리의 삶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우리가 속한 우주가 바로 그 모양 그 꼴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혀 위로는 되지 않는다. 다만 약간 납득하고 포기하게 될 뿐이다.
······ 이 세 사람의 세계선이 모두 시간을 닮아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즉, 세계선이 빛원뿔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또한 특이점에서 병호가 겪을 사건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병호가 특이점에 부딪친 후에 병호의 세계선이 더 뻗어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병호의 세계선이 특이점에 부딪쳤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수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병호의 세계선이 그냥 멈춰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으로는 병호가 "존재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병호가 보기에 얼마의 유한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시공간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병호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얘기하기 쉽습니다. 병호의 시계가 1을 가리킬 때, 3/2을 가리킬 때, 7/4을 가리킬 때, 15/7를 가리킬 때 등등에는 병호가 존재합니다만, 시계 눈금이 2 이상이 되면 병호는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병호가 "저는 이 사건을 경험하고 있으며, 제 시계는 2(또는 그 이상)를 가리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병호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냐고 물을 것입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 질문은 어느 정도 병호에 대해 해 볼 수 있는 실제 실험을 나타냅니다.
······ 그는 그런 운명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을 억누르고 안전한 갑돌이 곁으로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병호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짐작하듯이, 병호가 갑돌이에게로 되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얼마나 빨리(즉, 어느 사건에서) 하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그림84>는 이 가능성들을 보여줍니다.
먼저, 병호가 이 결심을 사건 v에서 했다고 해봅시다. 사건 v는 외부 영역에 있습니다. v에서 빛원뿔은 이미 어느 정도 검은 구멍을 향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만, 빛원뿔의 "뒤쪽"은 아직 연직 방향이 아닙니다. 이 일이 처음 일어나는 것은 지평면에서죠. 이제 사건 v에서, 병호에게는 자신의 세계선을 사건 v의 빛원뿔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는 향하게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령, 로켓으로 가속시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v에서 빛원뿔이 아직은 "너무 많이" 기울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병호가 자신의 세계선이 갑돌이를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병호에게는 사건 v 이후 자신의 세계선을 그림에 기찻길 모양으로 나와 있는 경로로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병호는 검은 구멍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병호가 검은 구멍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빛원뿔은 점점 더 "곧추섭"니다. 그러면 검은 구멍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결 쉬워집니다. 이렇게 해서 병호는 갑돌이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병호가 자신의 운명적인 결심을 지평면 위에 있는 사건 u에서 했다고 해봅시다. 사건 u에서의 빛원뿔이 그림에 나와있죠. 병호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선을 u에서 시작해 자신이 원하는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빛원뿔 안에 있다는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죠. 그러나 사건 u에 이르면 빛원뿔은 이미 매우 많이 기울어서 벌써 지평면에 접합니다. u에서의 빛원뿔 안쪽에 있는 어떤 방향이든 검은 구멍의 내부 영역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이점에 더 가까워지고, 갑돌이에게서 더 멀어지는 거죠. 따라서 찰나 뒤에는 병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부 영역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부 영역에서는 빛원뿔들이 훨씬 더 많이 특이점 쪽으로 기울어 있죠. 병호에게는 역시 특이점을 향해 계속 나 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빛 원뿔 안에 머물러야 하니까요. 병호가 특이점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 원뿔은 더 많이 기울어지며, 병호는 그만큼 더 강하게 특이점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호가 사건 u에서 결심을 했다면, 분명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병호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사건 w는 병호에게 더 가혹합니다. 여기에서는 이미 병호가 검은 구멍의 내부 영역에 들어와 있으며, 빛원뿔들은 이미 너무 많이 기울어 있고, 병호는 특이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검은 구멍의 외부 영역에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외부 영역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여지를 활용하면서도 검은 구멍에 가까이 다가가서 탐험하고, 더 멀리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다만, 지평면을 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일단 지평면에 다다르면 반드시 내부 영역으로 나아가며, 이윽고 특이점에 이르러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런 형태의 최후는 외부 영역에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든 가능한 일입니다. 즉, 10년 동안 내부 영역에 들어가기를 망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런 선택을 할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선의 방향을 바꾸어 지평면을 넘어서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지평면 넘어가기"는 기껏해야 단 한 번 겪을 수 있을 뿐입니다. (347~351쪽)
위에 소개한 부분은 책의 마지막 장으로, 책 전반에서 설명한 개념들을 최종적으로 블랙홀에 적용해보는 부분이다. 병호의 선택에 관한 설명들은 한 사람의 삶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선택이 제한되어 가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블랙홀 바깥에서는 빛원뿔이 뻗어 나갈 수 있는 각도도 넓고 방향도 전방을 향해 있다. 그러나 특이점에 가까이 갈수록 빛원뿔의 각도는 좁아지고 방향은 특이점을 향하게 된다. 유사하게,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진로나 미래에 대해 선택의 가짓수도 많고 선택의 방향도 비교적 넓다. 나이를 먹어가면 선택의 숫자는 줄어들고, 그 방향도 좁아진다. 어린 시절에도 물론 선택의 한계는 있다. 그 무엇도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특이점에 대한 설명은 죽음의 개념과 거의 같다. 만약, 옳은 길, 혹은 가고 싶은 길이 있다면, 특이점에 가까워지기 전에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행동이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번역이 매끄럽지는 못하다. 원서의 한계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문장과 수식에 오자(誤字)도 상당해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래도 원서의 제목인 'A to B'에서 나타나듯이, 상대성이론을 비교적 쉽게 겉핥기 해볼 수 있는 책이다.
'나의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의 수용소에서》 (0) | 2020.09.13 |
---|---|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0) | 2020.07.28 |
《국가란 무엇인가》 (0) | 2020.01.02 |
《21세기 자본》 (0) | 2019.07.21 |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0) | 2019.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