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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2017.
 
  읽은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기록을 남긴다.  
 
  국가에 관한 네 가지 입장이 있다.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목적론적 국가관이 그것이다. 국가주의는 국가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희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최우석 목표이며 따라서 국가는 국방과 치안 유지 등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유지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므로 청산 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목적론적 국가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국가가 '정의'라는 사회의 최고 선(善)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란 '어떤 것을 받을 만한 마땅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가는 불평등이나 불의를 해소하고, 동등한 자격을 갖춘 시민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복지국가나 진보자유주의는 네 가지 국가론 모두와 연관된다. 진보자유주의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그것의 번영과 존속을 위한 노력들을 긍정한다. 개인의 소극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차별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함으로써 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추구한다. 또한 진보자유주의는 사회적 약자와 저소득층의 지위 향상, 노조의 활동 보장과 영역의 확대, 자본가 계급의 전횡의 방지 등 계급 지배의 타파를 위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정의 실현이라는 국가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고 보며, 이를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과 개입을 긍정한다. 
 
  혁명은 언제 일어나는가?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강구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고, 지배층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변화의 가능성이 없음이 분명하며, 혁명을 통해 체제 전복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농후할 때 비로소 혁명이 일어난다. 따라서 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대비시키고, 후자가 전자보다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대중은 모든 가능한 방안을 강구하고 나서 마지막 수단으로서 어쩔 수 없이 혁명을 선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칼 포퍼. 자유주의자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의외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의 개선을 위한 방법도 고민한 학자이다. 다만 그는 혁명에 극렬히 반대했다. 혁명은 사람들을 이념이나 특정 가치의 노예로 만들어 과격한 문제 해결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예측하지 못한 참담한 결과를 불러오곤 한다. 인간은 어떤 일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에는 정보나 능력이 부족하다. 혁명은 이를 무시하고 너무나 큰 변혁을 시도한 나머지 무책임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보다는 점진적인 개량을 통한 사회의 개선을 추구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하이에크.  두려움에 떠는 자유주의자. 절대적 신념을 비판하면서 그 자신은 자유주의가 사회의 절대적 가치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에 빠졌다. (반면, 진보자유주의는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지는 않는다.)
 
  톨스토이. 사회적인 제도의 변혁이나 혁명보다 개인이 훌륭한 삶을 일구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중요하고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이 그러한 주장을 몸소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베른슈타인. 비스마르크의 재무장관. 사회주의 혁명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논리적이고 통계적으로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념이 사회를 전체주의로 몰고 가고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에 집착하면 현실 정치에 참여해서 변화를 일으키려는 시도들이 의미를 잃는다. 예를 들어, 노조의 정치 참여, 시민들의 조직화, 소비자 운동, 복지정책의 확대 등도 모두 현 체제를 지속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없는 활동이 되어 버린다. 그는 오히려 점진적인 개량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으며 정치 참여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들이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은 경제 대공황과  나치의 집권을 겪게 되고 그의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유럽 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이 제시한 길을 갔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책임윤리를 주장했다. 신념윤리(칸트)는 자기의 신념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가 어떻든 동기만 선하다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책임윤리는 '현재 시점에서 예측 가능한 범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중시한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는 신념윤리를 조금 양보할 수도 있다. 현실 정치에서는 신념윤리만 따르다가 최억의 결과나 비극을 불러온 사례가 많다(전쟁 등). 직업 정치인은 예측 가능한 결과 중 최선의 것을 달성하려는 책임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진보자유주의가 이에 부합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융통성과 유연성, 실리주의적 태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후불제 민주주의. 한반도의 남쪽에는 해방 후 국제 정세에 의해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즉, 한국은 민주주의를 별다른 희생 없이 얻었기 때문에 그 비용을 장기간 분할 납부하는 중이다. 서양 사회는 이 수준의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다. 
 
  혁명의 조건에 관한 부분에서 대중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는 느낌, 오히려 현명한 판단과 선택을 해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중이 혁명을 선택하는 과정, 그리고 점진적 개량주의에 관한 논의가 나에게 주는 일종의 위안도 있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인가 거대하고 중요한 가치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을 지니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선택의 기로에 세우곤 했던 시도들이 결국은 어떤 특정 신념의 노예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나의 그간의 선택이 꼭 비굴하고 망설이고 용기없는 성격 때문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비록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계속 더 나은 삶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혁명적인 삶을 선택하지 않은 나를 자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머뭇거림이 옳은 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준다.
 
  예를 들어, 스스로 신념에 가득 차서 '나는 의사가 되어야 해', '나는 판사가 되어야 해'라는 확신에 찬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의사나 판사가 된다. 어떤 사람은 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한 신념과 강한 의지는 분명 가치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쩌다가' 의사나 판사가 된 사람들보다, 혹은 '어쩌다가' 회사원이 된 사람들보다 더 진실된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가끔은 그런 '자신감의 화신', '자기애의 화신'과 같은 사람들이 이상하다거나 딱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가? 그들이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그들이 '어쩌다가' 비정규직이 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신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및 복지국가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또한 민주주의란 생각보다 가치 있고 괜찮은 제도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비록 내 한 표의 가치는 보잘 것 없고 함량 미달의 얼치기들이 정치판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시민의 정치적 참여로 정권을 바꾸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또한 내가 세금을 내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연대에 참여하는 한 방법이라는 점에서 나름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