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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김건 外 6, 《나는 복지국가에 산다》, 꾸리에, 2013.
 
들어가며
 
  한국 사회에 관해 이야기하고 나면 다른 나라는 어떤지 궁금해진다. '무엇이 당연한 것일까',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들이 내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하는 물음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북유럽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나면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의 피로, 불안, 스트레스 그리고 우울함은 내 잘못이 아니다' 이런 위안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된다. '나는 이러한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나의 생각과 사고방식의 많은 부분들이 내가 속한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그와 함께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가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북유럽에 관한 책을 계속 집어 들게 된다.
 
  이 책은 노르웨이(한 명은 스웨덴)에 거주하고 있는 박노자를 비롯한 7명의 한국인, 또는 한국과 관련있는 사람들 각자가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에서 살면서 느낀 점을 쓴 것이다. 필자에 따라서 북유럽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 중 박노자와 정의성이 쓴 글이 가장 비판적이다. 여기서는 박노자의 글을 중심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되짚어 본다.
 
 
 
 
사람은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가? 
 

  예컨데 내가 보수언론이 '귀족'이라고 부르는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동자라고 치자. 기계의 나사가 닳도록 돌고 돌듯이, 나는 내 직장에서 그 어떤 관리권도 행사하지 못하면서, 순전히 관리자의 지시에 따라 주당 60시간 정도의 죽음 같은 노동으로 한 달에 3~4백만 원을 받는다고 해서 과연 행복하겠는가? 내 월급의 6~70퍼센트 정도만 받으면서 나보다 더 고되게 일하는 1년짜리 비정규직 동료들의 얼굴을 매일 보면서 정말 내심으로까지 행복하겠는가? 내가 아니더라도 내 아들은 비정규직으로 평생 고생할 확률이 많다는 점을 알면서 말이다. 나의 연봉이 6~7천만 원 이상이라고 해서, 언제 파산이 나서 길거리에서 굶을지도 모를 영세상인, 노점상들을 맨날 보면서 나는 정말 행복하겠는가? 그들을 보면서 '내가 아닌 그들이 몰락하고 내가 그나마 살아 남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야 있겠는데 이는 행복이라기보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경제동물의 자기만족에 가까울 것이다. 행복은 보편적인 것이라서, 언제나 남들과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남들이 불행한 것을 보면서 혼자서 즐겨야 하는 '행복'은 과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인가? 그리고 극도록 불평등하고 착취적인 사회에서 그 누가 진정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가? (14~15쪽)

 
  책 서장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박노자는 사람은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도 그 이유를 명확히 말하지는 못 하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해봄으로써 그 이유를 느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내가 벼락부자가 되어서 좋은 옷을 걸치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꽤 만족스럽고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이 좋은 것들을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가족들도 같이 누리게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벼락부자가 된 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사람의 불행에 의한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의 불행은 나의 나의 실수나 과실, 잘못 때문이 아니라고 가정하자. 나는 조금 찜찜해하거나, 아니면 별로 행복하지 않거나, 아니면 약간 불행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만약, 그 사람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 친구라면? 내 가족이라거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그 사람의 관계가 가깝고 애정과 혈연으로 맺힌 관계일수록 나는 더 큰 불행을 느낄 것이다. 이제는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이 더이상 '좋은'것이 아니다.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나의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지 않게 만들수 있다면 예전 상태로 되돌리고 싶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이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만 원짜리 음식보다는 10만 원 짜리 음식이 더 큰 만족을 줄 것이다. 그러나 10만 원 짜리 음식이 더 큰 불행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나와 그 사건, 그리고 내 주변사람들 과의 관계인 것 같다. 100이라는 숫자가 있을 때, 이것이 음수인지 양수인지는 숫자 앞의 +와 -부호가 결정하는 것처럼, 어떠한 사건이 행복을 주는지 불행을 주는지는 나와 그 사건, 그리고 내 주변사람들을 포함하는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같다.
 
  이 관계에 따라서 내가 '자긍심'을 느끼는지 '죄책감'을 느끼는지가 결정된다. 자긍김과 죄책감 모두 자기 내면의 감정이지만 이러한 감정이 생기는 이유는 지극히 사회적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기여를 하게 되면 나는 큰 자긍심을 느낀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노력해도 못 해낸 일들을 내가 쉽게 해낼 경우, 즉, 나의 강점을 발휘한 경우 자긍심은 크게 고취된다. 반면, 내 잘못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 그 잘못이 나의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면 때문이라서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면 큰 좌절감과 함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두 감정은 인류가 무리 생활을 하는 쪽으로 진화해 오면서 습득하게 된 형질이 아닌가 싶다. 이 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성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정규직이고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정규직이라는 안전함과 높은 연봉이라는 여유가 나에게 자긍심을 안겨 주는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지가 중요하다. 현재 한국에는 비정규직이 매우 많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2018년에 33%로 임금 근로자 3명 가운데 1명이 비정규직인 셈이다(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4015&clasCd=7). 내 주위에도 비정규직은 흔하다. 정규직인 내가 느끼는 감정은 뭘까?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미안함, 약간의 죄책감을 매일 느끼면서 일한다. 비정규직인 본인이 느끼는 불안함과 조급함보다는 낫겠지만, 이런 감정 역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그것만이라도 감사히 생각하라고 충고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의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히 생각하고 행복감을 느낀다면, 내 옆의 비정규직 직원이 느껴야 할 비참함과 불안감은 더 커질 테다. '저 사람처럼 되기 위해서는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하게 될 것이다. 나의 행복이 곧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강조하거나 정당화하는 상황, 이런 상황이 한국에서는 일반적이다. 
 

  나는 왜 '평등'의 가치에 이렇게 절대적인 강점을 두는가? 옛날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작가 코롤렌코(Vladimir Galaktionovich Korolenko, 1853~1921)는 "새가 비상하게끔 만들어지듯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이야기했다. (14쪽)

 
  따라서, 그리고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행복은 평등이 그 전제 조건이 된다. 평등은 사람들이 '같은 처지',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같은 처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과는 소통이 원활하다. 나도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가 수월하고 그도 나의 입장을 이해하기가 수월하다. 따라서 친밀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나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내가 내 차(車)를 갖고 있는데 내 옆 직원도 자기 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만 내 차를 갖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혹은 나와 옆 직원 모두 자기 차가 없을 수도 있다. 차라리 이 상태가 둘 중 한 명만 차를 갖고 있는 상태보다는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여기서는 '생존'이나 '안도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명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살아 남은 쪽이 나라면, 나는 분명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행복과는 다르다. 행복의 조건은 '둘 중 한 명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상황'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둘 다 안전한 상태여야 함은 말 할 필요도 없다. 당연한 전제조건이다. 그런 상태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같이 나눌 수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둘 중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을 억지로 만들어서, 행복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열 보(步)쯤 미리 퇴보를 시켜 벼랑 끝으로 몰아 붙임으로써 복지라든지 창의성과 적성에 관한 논의는 시작도 못 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한국 사회가 처한 상황이고,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역학(力學)인 것 같다.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
 

  노르웨이에서 복지국가의 기본적 기틀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 초기였다. 당시 노르웨이의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인접국가인 소련처람 아예 체제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비록 의회에서는 약세였지만, 급진적인 노조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수정당들이 차선책으로 차라리 복지개혁을 실시하겠다는 노동당의 집권을 수용한 것은, 결국 혁명에 대한 공포로 인한 하나의 양보였다면 양보였다. 1945년 이후에는 노동당이 장기집권했는데(1961년까지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확보해, 복지 관련 법안을 문제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다) 공산당은 여전히 노조에서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다. 친미적 노동당으로서는 이는 최대의 경쟁이자 위협이었고, 공산당에 노동자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권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복지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 교육과 의료무상화부터 시작해 1960년대 중반 노년연금/병가수당 등을 지급할 종합적인 국가복지기금의 설립까지, 1945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주된 복지 개혁들은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또 일면으로는 자본으로서도  내수기반 내실화, 즉 유효 수요 늘리기 차원에서 복지 개혁들이 유리한 측면이 있어서 이와 같은 계급 간의 타협이 가능했다. 그러나 밑으로부터의 투쟁과, 보다 가열찬, 혁명적 투쟁의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런 타협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253~254쪽)

 
  복지국가는 노동자 계층이 연대하고 싸워서 얻어낸 성과물이라는 설명이다. 오직 여러 사람들이 조직화 되었을 때 큰 힘을 쓸 수 있고 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한편으로 한국이 얼마나 파편화된 사회인가를 느끼게 한다. 나는 '한국이 동양과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다'는 식의 설명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단에 소속되려 하고 집단 규범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만큼 개인주의적인 사회는 아마 미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의 문제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많은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을 치르는 데는 몰두하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그렇게 청춘을 보내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단결되어 자기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일까? 노르웨이의 1930년대 초도 먹고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같은 위기상황에서도 대응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또한 위 인용문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러한 싸움에 참여한 노르웨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어떠했을지 상상을 해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용감하게 앞정서는 바이킹의 모습이랄까?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강건함과 우직함을 발견하고 싶다. 
 
 
 
복지국가의 현실  
 
  내가 박노자의 글을 처음 읽었던 것은 10여년 전 쯤인 것 같다. 그때에도 느꼈지만 상당히 이상주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저자 소개를 잠깐 보자.
 

  상위 1퍼센트 내지 5퍼센트의 부를 가져와서 나누어주는 부의 재분배 프로그램, 자본의 사적 소유영역을 과감히 축소하여 그러한 재분배가 지속적일 수 있도록 공공화하는 것, 모든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 복지가 이런 방향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사람들의 삶이 추락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현실적 인식이다. 이상적으로는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그 자체의 철폐를 꿈꾼다. (230쪽 작가 소개 중)

 
  그는 자신의 이상이 명확하고 거기에 대비해서 현실을 평가하기 때문에 매우 비판적이며 그 비판의 날이 무뎌지는 법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우리가 이상향으로 여길 만한 북유럽에 대한 쓴소리를 이어간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피곤하다거나 비현실적이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런 시각도 분명 필요하다.    
 

  복지 지출은 징세에 의거하지만, 북유럽 국가들의 세수 기반은 기업세나 주식 양도세, 배당금 과세 등이 아닌 개인소득세에 의존한다. 스웨덴의 기업세 최고세율은 26퍼센트, 노르웨이는 28퍼센트인데, 이는 일본(40퍼센트)이나 미국(35퍼센트)보다 다소 낮은 수준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거주자 배당금 과세 세율은 15퍼센트 정도인데, 이는 벨기에(25퍼센트)나 중국(50퍼센트), 폴란드(19퍼센트)보다 낮은 수준이다. 결국 복지 지출의 상당 부분은 노동자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전체적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재분배의 필요성에 대한 각오를 가지고 일반인 각자가 이렇게 세금을 많이 내는 것도 우리와 같은 '차이의 사회', 개개인 돌벌이/씀씀이 위주의 사회보다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이는 완전한 평등의 이상과는 아직도 한참 먼 것이다. (258~259쪽)

 
  복지 지출에 쓰이는 돈은 대기업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쾌척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이 낸 세금에서 나왔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스웨덴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다만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좀더 안전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지국라라는 자본주의의 특수한 형태(수정자본주의)와 '인간 해방', '자본주의 모순 극복'을 혼동하는 일이다.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 즉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 축적이 가져다주는 모순들(저임금 노동착취, 자연 파괴, 불필요한 소비의 증가, 각종 차별 관계들의 재생산 등)을 부분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다 해도, 본격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노르웨이 사람들도 학교에서의 가혹행위(집단 따돌림)부터 자살까지 (노르웨이 자살률은 10만 명단 11명으로, 영국이나 독일보다 약간 높다) 여타 계급사회가 앓고 있는 모든 병리현상들을 다 앓고 있다. (262쪽)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가게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소매업 시장의 99.3퍼센트를 네 개의 큰 독점기업(체인점)이 독차지하는 노르웨이에서는 '가게를 내서 장사에 성공했다'는 유의 이야기는 이미 '머나먼 과거의 동화' 취급을 받는다. (251쪽) 

 

  '자본주의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착각을 계속 갖고 있을 만한 여유가 아직 있는 곳이 호주나 노르웨이이다. (233쪽)

  
  노르웨이를 비롯한 복지국가의 현실에 대한 지적들이다. 내 눈에는 부러울 따름이지만, 그의 눈에는 문제점이 많다. 
 
 

지구인 전체가 노르웨이만큼의 소득 및 소비 수준을 누리자면 우리에게 약 세 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61쪽)

 
  놓치기 쉬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지구인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들 만큼의 생활수준을 향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과 복지를 지향하면서도, 우리는 숙명적으로 소비의 축소를 같이 논의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많이 소개된 에코르네스(Ekornes)란 회사가 있다. 노르웨이에서 연매출 기준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표적인 가구기업으로 소파나 안락의자 등을 만든다. 공장 노동자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2교대로 나눠 하루 7시간씩 주 5일 근무를 한다. 동시에 1시간 일한 뒤 5분 휴식이 보장된다. 1934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인위적인 해고는 없었으면 만 67살의 정년이 넘어서도 본인이 원하면 일을 더 할 수 있다. 직원 연봉은 평균 40만크로네(약 7,500만 원)로 업계에 비해 10퍼센트 높게 준다. 연 매출(5,500억원)의 20퍼센트가 직원들의 급여로 지급될 정도로 인건비 절감과는 거리가 멀다. 아르베 에코르네스(Arve Ekornes)  연구개발(R&D) 총괄 담당은 창업자의 3대손이자 여전히 대주주 일가이면서도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격을 갖춘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세습을 일삼는 한국의 대기업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251~252쪽)

 
  스웨덴의 한 기업을 소개하고 있다. 박노자도 특별한 비판 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사실 모든 기업이 따라야 할 기본적인 정책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기본소득제도
 

  기본소득을 현존의 실업수당 기본 수준에 맞출 경우, 기본소득제의 도입은 실업자들이 거쳐야 할 절차를 간편화시키는 등 복지사무소의 일을 많이 덜어주며, 행정비용을 절감시키고, 또 실업상태에 대한 공포를 많이 없앨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면이 많다. 그런데, 어차피 굶어죽을 위험이 없는 노르웨이보다는 오히려 굶어죽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고, 또 일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한국에서야말로 기본소득제는 훨씬 더 주효할 듯하다. (267쪽) 

 
  기본소득제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한 적이 있다(https://leekangho.tistory.com/5?category=830195). 기본소득제도는 상황과 연령에 따라 복지 지원을 하는 게 번거롭고 비용도 많이 드니 그냥 공평하게 모두에게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자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실제로 이 제도를 실험해 보기도 했다. 기본소득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법 
 

  현재 한국의 진보(?)가 당하고 있는 재앙들은, 물론 국가 탄압이나 언론 등에서도 기인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우리 자신들의 무서운 결점들과 관계가 있다. 한국 진보의 상당 부분은 명문대 출신의 학벌 귀족들이며(반대로, 노르웨이 노동당을 창당한 사람 중에는 고교 졸업생도 거의 없었으며 전부 다 현장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사도 대체로 현학적인 '내부 토론' 안에 있다. ... (중략)... 진보를 독점해온 학출들이 진보를 망가뜨린 것 같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장 요구에 의거한, 현장 위주의 단결이 아닌가 싶다. ...(중략)... 부자와 기업이 많은 세금을 내고 모두의 생계가 보장되는 사회를 원하는 모든 이들은 전술적으로라도 뭉칠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뭉쳐야 위력적 조직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256쪽)
 

  한국에서 진보 정당이 힘을 못 쓰는 이유는 외부의 탄압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현장에서 동떨어진, 탁상 공론이나 하는 범생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정치인을 만나 보거나 그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본 적도 없지만, 겉에서 보기에 한국의 진보 정당이 북유럽과 같은 성과를 낼 만한 역량이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그들에게는 힘 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뭉치게 하여 큰 힘을 이끌어 낼 역량이 부족해 보인다. 그들은 이슈를 먼저 생산해내서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적 메시지를 개발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메시지는 참신하면서도 현실의 고통과 아픔, 부조리, 그리고 이에 대한 분노를 가장 적절하게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메시지가 사람들 마음속에서 울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소수이고 약한 만큼, 더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그들은 큰 정당이 A나 B라는 주장을 하면 그것이 맞네, 틀리네, 그게 아니라 C가 맞네 하는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논의의 틀을 깰 줄도 모르고, 새로운 판을 짤 줄도, 판을 주도할 줄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담대함과 창의성이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언론 탓을 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그러나 일개 개인도 유튜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즈음이다. 이는 중요한 건 콘텐츠라는 뜻인데, 역으로 그들에게는 콘텐츠를 생산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나는 박노자가 말한 것처럼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현실이 어떤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가려운 곳이 어디인지, 이 타이밍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직감적으로 느끼지를 못 하는 듯하다. 그래서 가끔 그들의 진정성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임금 노동자와 그들과의 거리보다는 거대 정당의 정치인들과 그들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많다. 언어적인 감각도 부족해 보인다. 전략적인 사고를 할 줄도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지적인 역량을 보여준 일이 있었던가? 나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역량, 즉 사람들을 뭉치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은 젊은이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당 시스템 안에 젊은 사람들을 얼마나 잘 끌어 안느냐가 그 정당의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반면, 현재 한국에서 청년층이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는 기존의 낡고 늙고 능력없는 정치인들 때문이고, 그들이 연명할 수 있는 이유는 양대 정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첫 걸음, 그리고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첫 단추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대선거구제를 비롯한 유럽형 선거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참조 : https://newstapa.org/43939).
 
 
 
생활 속의 평등, 그리고 평화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한국 대학 교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비정규직 왕따시키기'는 그 유치한 폭력성으로 볼 때 '상아탑'이라기보다는 중학교 불량배 수준에 더 가까운데도 말이다. (245~246쪽)

 
  박노자는 한국의 대학교에서 경험한 불평등과 권위주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이 책 전체의 주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의아스럽긴 하다. 다만, 여기서 그의 이상주의적인 면모의 유용성이 빛을 낸다. 한국 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권위를 너무 쉽게 인정하고 그것에 너무 쉽게 굴복한다는 점이다. 권위의 근거에 대한 의심은 입 밖에 내지도, 생각할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외부인이 보기에는 권위를 내세우고 또 그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는 그 꼴이 "중학교 불량배" 수준밖에 안 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세태에 젖어 있어서 무엇이 당연한 것인지, 평등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게 되었다. 따라서 외부인의 시각으로 이를 지적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박노자의 글은 이상적인 만큼, 그러한 기준점을 제시하는 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열세 살 정도 된 한 여학생에게 실기 주법에 관한 설명을 적었던 칠판을 지우라고 지시했다. 그 학생은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침착해졌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요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일은 선생님의 직무에 속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월급을 받는 데에는 이 일도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만약 꼭 내가 도와주길 원하신다면 제게 예의를 차려서 부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응?"
  이럴 수가……!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9쪽)
 

    이 글은 박노자의 글이 아닌 백명정의 글이다. 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매우 씁쓸한 광경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결국 국제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광경이다. 유교의 오륜(五倫) 중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이 있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순서, 혹은 서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존중과 배려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교육을 받는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좋은데, 아이들이나 나이 어린 사람들이 어른들로부터 그 정도의 배려, 혹은 웃어른을 배려한 것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장유유서라는 말 자체가 상호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라 일방향적인 서열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을 공경함으로써 얻어지는 윤리적, 사회적 가치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존중이 아랫 사람에게는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장유유서는 한국 사람들이 불평등과 불합리함에 대해 항변하지 않고 이를 당연하게 몸으로 받아들이는, 아주 좋은 기전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부나 권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사회 지도층거나 높은 자리에 있거나 권력이나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다. 그들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잡일을 하고, 심부름을 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리다. 그들이 윗 사람들의 지시에 따르는 순간, 윗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서 따라야 하는지, 그들이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지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릴 때 몸으로 익힌 장유유서가 권력과 부에 대한 굴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게 된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존중을 받지 못 했는데, 나보다 나이도 많고 거기다 돈과 힘까지 가지고 있는 사장님한테서 내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평등으로부터 멀어지고, 어른이 되어서는 더 멀어진다.
 
  위 인용문에 나타난 아이의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할 당연한 태도다. 저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각자는 자신의 권리를 언제든 행사할 수 있으며,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러한 태도를 지닌 시민들이 너무 희소하다. 장유유서에 짓눌려, 당당함과 자신감을 갖춘 민주 시민의 모습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저 아이처럼 키울 수 있을까? 자녀가 저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수 있다. "버릇이 없다", "어른을 우습게 본다", "예의가 없다"는 등의 비난을 들을 수 있다. 자녀가 어른이 되어서도 위계와 서열이 명확한 조직 생활을 잘 해나가기 힘들 수 있다. 선배가 "제일 어린 막내가 청소를 해야한다"고 하면, 내 아들 딸은 "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하나요?"라고 따질 테고, 그러면 미운 털이 박히고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알아서 기는 게 속편하다. 그렇게 시간은 의미없이 흐를 것이고, 영혼은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나는 내 눈빛이 잘 훈련된 개의 눈빛을 닮아 갈까봐 두렵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지상의 낙원으로만 보인다면, 한번 이곳에 와서 살아보시라. 이곳 사람들의 삶은 매우 검소하고 단순하다.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옷까지 겉치레가 없다. 1년에 외식하는 빈도는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청소부터 집수리까지 거의 대부분 스스로 한다. 오락시설이나 유흥시설도 극히 적다. 다른 이들에게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어렵다. 한국의 향락문화를 마음껏 즐기는 사람에게 여기 생활은 너무나 따분하고 건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보다 불안과 걱정과 근심의 수준이 절반이 아니라 그 반의 반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곳에서 사는 해가 길어질수록 나는 삶의 참맛을 더욱 느끼곤 한다. (226~227쪽)

 
  이 부분도 백명정의 글이다. 백명정은 상당히 긍정적인 관점에서 글을 썼다. 불안과 걱정과 근심의 수준이 저렇게도 낮단다. 헌법 속에 있는 "평등"이 법전 밖으로 빠져나와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현실화 된다면, 저렇게 평화로운 모습과 분위기를 보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나도 직접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나오며
 
  다시 한 번, 우리의 일상 생활이 사회의 제도나 시스템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활 속의 평등은 사회 전체의 평등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 북유럽 사회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일구어 낸 평등의 수준이 부럽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좀더 많은 시간을 쉬고 싶고, 더 긴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지 못 하는 이유는 내가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 불안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이 책과 이 글이 대답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