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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재

《정치가 우선한다》

셰리 버먼 지음, 김유진 옮김, 《정치가 우선한다》, 후마니타스, 2010. 
 
 
들어가며
 
  사회민주주의의 본질,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유럽이 2차 세계대전 후에 안정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도 계급간 갈등이 완화되었고 사회는 평화로웠다. 자유주의자나 시장주의자들은 이것을 자유시장이 이룩한 성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장이 훨씬 자유로웠던 19세기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 갈등으로 불안과 폭력이 난무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부의 경제적인 번영과 사회적 안정은 자유주의나 시장경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저자는 이것이 시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적절히 통제했던 사회민주주의 이념의 성과라고 주장한다. 책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본다.
 
 
 
출발점
 
  유럽에서는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자본주의가 급속이 발달하면서 많은 사회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착취와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빈곤층의 생활은 처참해졌고 계급 간 갈등은 심화되었다. 삶의 터전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전통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뿌리 뽑히게 되었다. 수백, 수천년 간 사람들을 지탱해주던 지역사회와 마을 공동체가 와해되면서 이제 그들은 힘없고 외로운 개인으로 살아게게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빈부격차, 인간소외, 그리고 인간의 원자화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였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는 이 과제에 대해 꽤나 매력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사람들의 생각, 생활방식, 가치관, 그리고 문화조차도 경제적 여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한 시대나 사회의 정신적인 영역을 결정짓는 것은 그 사회의 물질적인 기반, 즉 '생산양식'이다.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인 의식과 문화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의회나 선거 같은 민주주의 제도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반 위에 놓인 장식품들이다. 따라서 생산양식의 변화가 정치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역은 성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운행 원리는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행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그 종착점에 다다른다.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가 거듭되다보면 더이상 착취가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고, 자본주의는 동력을 상실하여 붕괴되고 만다. 물론, 그 시점이 되면 노동계급은 자연스럽게 혁명을 일으키고 당연히 세상은 노동자 대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은 '경제결정론'과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으로 요약된다. 엥겔스와 카우츠키는 이 원칙들을 대중에게 크게 부각시켰다. 처음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들을 죽도록 괴롭히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그들이 지녔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옳다는 확신과 이것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되는 것이지 사람들의 의지로 전복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굳이 의식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이는 특히 사회주의 정당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계급과 협력하거나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도 무의미했다. 자본가, 부르주아, 소상공인, 농민 등은 사회주의 시대에서는 모두 사라질 계급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혹은 그들과 함께 정치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은 곧 사라져버리거나 척결되어야 할 무리들을 연명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정주의
 
  경제결정론 때문에 사회주의 진영 정치 지도자들은 눈 앞에서 노동계급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에 의하면 사회주의 정당은 오직 미래의 주인이 될 노동계급을 위해 존재해야 했다.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계급들과 협력하는 것은 적과 동맹을 맺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이들은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또한 주어진 의회정치나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도 안 되었다. 의회정치와 정부는 곧 멸망할 자본주의 사회의 수구 세력들, 즉 부르주아를 위한 장치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정당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지지자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유권자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낳은 개인화, 원자화 문제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 사회처럼 강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고 싶어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민족주의자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진영은 무능력하게 보고만 있었다. 곧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수정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경제결정론'과 '계급투쟁의 불가피성'을 과감히 포기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이를 적절히 통제하면서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을 통해서 빈부격차나 실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노동계급을 위한 정당에서 벗어나서 농민이나 소상공인 등 고통 받는 모두를 위한 국민 정당이 되고자 했다. 대중의 지지가 커질수록 현실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문제들을 신속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 기준은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이었다. 조르주 소렐을 비롯한 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은 사회문제를 급격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가치나 절차를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선거와 의회정치를 통해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 자체가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가치를 이미 포함하고 있으며 더 나은 사회주의를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원칙주의자들
 
  엥겔스와 카우츠키와 같은 원칙론자들은 수정주의를 거부했다. 그들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모른척했다. 이론적 순수성과 완벽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들은 융통성과 유연성을 발휘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자본주의가 붕괴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중들은 그들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혁명적 수정주의의 득세와 패배
 
  혁명적 수정주의는 민족주의적 우파들과 결합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으로 발전해갔다. 사람들은 민족주의처럼 그들에게 소속감과 유대감을 부여해 줄 감정적인 구심력을 원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그것을 제공해 줄 수 없었다. 민주적 수정주의자들도 원칙주의자들과의 갈등 속에서 시간만 보내다가 결정적인 기회를 혁명적 수정주의자들에게 내주고 말았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득세하여 세계전쟁을 일으켰다가 몰락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승리
 
  2차 세계대전 후 서방 국가들의 발전은 지극히 사회민주주의적이다.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많은 제도들이 시행되었다. 의료, 교육, 빈곤층 지원, 보편적 복지 정책들을 통해 대중의 전반적인 생활 여건을 향상시켰고 사회적인 갈등을 줄여나갔다.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열매를 향유하면서도 그 독은 현명하게 피해갔다. 저자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들이 서방 국가들, 특히 서유럽 국가들이 20세기 후반부에 평화와 번영을 누린 이유라고 말한다. 
 
 
스웨덴
 
  스웨덴은 특이한 경로를 밟았다. 스웨덴에서는 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이 득세를 하지 못하고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이 그 자리를 꿰찼다. 국제 사회주의 정당들의 세계에서 변방에 속했던 스웨덴 사민당은 처음부터 민주적 수정주의의 길을 선택했다. 국제적인 비난이나 우려는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자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람들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들을 실행해 나갔다. 사회주의 정당 세계에서 주인공 격이었던 독일 사민당이 자신들의 체면 때문에 마르크스 사상의 순수성에 집착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결과 스웨덴은 그 어떤 국가들보다도 먼저, 그리고 오랫동안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 
 
 
21세기의 사회민주주의
 
  20세기 말부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각 국가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위기를 맞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들의 성과들을 당연한 것,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적 안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실제로 놀라울 만큼 그것들의 공존할 수 있도록 실행 프로그램을 개발해 낸 것은 바로 사회민주주의였다. 따라서 20세기의 가장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이런 사회민주주의적 타협의 성공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취였는지를 잊게 했다는 점이다. (317쪽)
 
  사민당의 당원 수는 급감했고 사람들은 이제 사민당에게 별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욕망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융통성과 적극성을 발휘해야 한다. 사람들은 항상  "소속감에 대한 갈망"(301쪽)을 지니고 있다. 이는 개인화 된 사회, 즉 근대성이 야기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들은 더 큰 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고 그 속에서 유대감과 안정감을 느끼고자 한다. 이를 외면한다면 20세기 초중반처럼 엉뚱한 이들에게 기회를 내어줄지도 모른다. 예전처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의 현실적인 행복을 위해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행동으로 이를 실행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좀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며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자신들의 과제라는 확신에 따라 움직여왔다. 베른슈타인에서부터 헨드리크 드망, 카를로 로셀리, 페르 알빈 한손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언제나 특정 정책을 대할 때 그것을 그저 그 자체 목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현재 지향적 정책과 미래 지향적 목표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또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그 원래의 구상에 따른다면,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는 것이 정치적 승리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현재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324쪽)

 
 
 
나오며
 
  저자는 시대와 사상의 관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를 자본주의가 일으킨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법들이라고 말한다. 마치 중국 역사에서 주나라 멸망과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답하는 과정에서 제자백가가 출현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가 춘추전국시대의 문제들과 제자백가 사상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그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 시대의 특수성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속한 지금의 문제들을 인식하고 현재의 사상들을 이와 연관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자신을 미래시점에서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대신 이를 해내고 있다.  
 
  '20세기 후반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마르크스주의, 나치즘과 파시즘, 공산주의국가의 출현, 세계대전, 복지국가의 보편화 등 19~20세기에 일어난 굵직한 일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개별적인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다. 자본주의, 더 넒게 보아서 '근대성'이라는 시대적 특수성이 야기한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대한 반작용, 그리고 각 국가들의 특수성과 문맥들이 빚어낸 하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흐름의 후반부에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으로서 사회민주주의가 제시되었다. 20세기 후반부에 비로소 이 대안이 실제 현실에 시험 적용되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초국적 거대 금융자본은 21세기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정치는 여전히 국가를 단위로 수행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처럼 국경 안에서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데에는 적합했겠지만 이제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주의를 통제하기는 역부족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주의적이며 근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지난 몇 세기처럼 근대성은 여전히 '소속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 더 복잡해진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누가 내놓을 수 있는가?
 
  나는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의 과반이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이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사회민주주의는 다수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이상 자체가 현실적이다. 사상가들은 생각하고 나서 말을 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숙고하고 나서 실천한다. 현실은 항상 생각과는 다르거나 변화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유연하게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이미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듯이, 현실을 개선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어떤 생각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미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듯이, 현실을 개선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어떤 생각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럼에도 일관되게 정의를 추구한다. 결코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듯 정의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날을 예리하게 세운다. 이러한 특성들은 21세기의 복잡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거피취차(去彼取此). 노자의 도덕경 12장에 나오는 말이다. 저 멀리 있는 것(이상)을 버리고 여기 가까이에 있는 것(현재의 실익)을 취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사회민주주의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 100년, 200년 혹은 천 년 후일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천 년 후에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인류 최고의 예언가이자 사회과학자로 추앙을 하든 말든, 그 사이에 세상에 왔다 떠나간 사람들의 삶은 변함없이 소중하다. 이론과 사상, 또 그에 따른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은 '저기'에 있는 것이다. 내 삶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들, 내가 마주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의 생활, 감정, 노동, 근로 시간, 여가, 월급, 건강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것들을 개선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정치가 우선한다".   
 
  잉그바 카를손과 안네마리 린드그렌이 지은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 입장과 정책들을 주로 다루었지만 논리적인 뒷받침 없이 주장이 난무하여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반면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기원과 역사, 그것과 다른 사상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현재에 갖는 의의까지 논리적으로 다루어서 사회민주주의를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번역서를 읽으면 엉터리 번역과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무리없이 정확하게 번역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