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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知圖)

의심

  점심시간,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우리 일행도 그 뒤에 선다. 커피 한 잔에 삼사천 원이다. 여기에는 재료값뿐만 아니라 임대료, 인건비, 마케팅 비용, 각종 유지비, 그리고 사장과 본사에 돌아가는 이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가 항목별로 그 숫자까지 알 수는 없다. 경제학자들은 커피 한 잔을 사 마신다는 것은, “커피 원두와 뜨거운 물의 혼합물뿐만 아니라 거기에 들어간 노동력, 카페의 접근성이 주는 편리함, 그리고 매장 인테리어와 음악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 그리고 그 카페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까지 같이 구매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왜 하필 사천 원이어야 하는지, 그 가격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커피 한 잔은 대략 얼마 정도이다'라는 '감각'을 지니고 있을 뿐, 그 감각을 이성적으로 분석해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구입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왜 하필 그 가격에 구입하려는 것인지 그들 자신도 잘 모를 것 같다. 그들이 정말 커피를 좋아하는 것인지, 그것에 사천 원만큼의 가치와 효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자기도 그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는 사회적인 행위이다. 백화점에서 오백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샀다고 치자. 가방의 품질과 쓰임새가 그만한 가치를 한다고 여겨서 그것을 샀을 수도 있다. 혹은 그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방 하나를 오백만 원이나 주고 사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매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럴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어야 하고, 둘째로 내 주변이나 내 시선이 머물렀던 사람들 중에 그러한 고가의 가방을 메고 다녔던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요즘처럼 빚을 쉽게 질 수 있을 때는 두 번째 조건이 특히 중요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가방을 구매한다는 사실은 내가 그 행동을 '해도 되는 행동'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것이 내 구매의 전제조건이다. 
 
  이는 한국의 아파트 가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한 채에 수십억원까지 한다. 토지 가격을 포함한 원가를 고려하더라도 이러한 가격은 비상식적이다. '앞으로 더 가격이 오를 것이다'라는 투기 심리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의 높은 가격 형성과 기대심리는, '집을 이 만큼의 돈을 주고 사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는 가격에 대한 승인이 그 전제조건이 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내가 직접 살 집을 내가 평생 일하면서 돈을 아껴도 모을 수 없는 큰 돈을 들여 사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한 채에 몇 십억 원이나 하는 집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그렇게 이상하지 않은 보통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가격에 집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빚을 내서라도 이십억 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일은 '해도 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만약 나 홀로 그러한 거래를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정신 나간 사람쯤으로 여길 것이다.
 
 이렇듯 돈을 쓰는 일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돈 뿐만이 아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 역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시간을 쓰는지에 따라 가능한 범주가 정해진다. 한국은 근로시간이 매우 긴 사회다. 주당 근로시간은 OECD 국가들 중 항상 선두권이다. 즉, 우리는 대개 돈을 버는 데에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런데 지구상의 어떤 사회에서는 '일을 하는 데에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다니, 말이 되나?'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만을 표현하지 않고 현 상태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우리 주변에서는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 '해도 되는 일', 더 나아가 '보통의 일'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시간 동안 일하는 사람들, 혹은 더 긴 시간동안 근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뉴스에서는 과로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는 너무나도 보편적이어서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의 시간은 곧 나의 삶이다. 따라서 나는 삶의 큰 덩어리를 돈으로 바꾼 다음, 그 돈으로 무언가를 구매하고 있다. 구매하는 행위를 하는 데에 또 삶의 일부를 소모할 뿐만 아니라, 그 구매가 정당한 것인지, 얼마만큼의 가치를 얻있는지에 대한 인식조차도 못하고 있다. 커피 한 잔에 사천 원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방 하나에 오백만 원이라는 것이 정당한지, 아파트 한 채에 이십억 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한 생각이 없다. 피곤해서인지 귀찮아서인지 그런 복잡하거나 깊은 생각을 하는 것을 별로 원치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의 문제다. 별 생각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가다가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벼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사기(詐欺)는 수천, 수만, 수백만 명이 같이 당할 수도 있다. 
 
  다수가 만들어내는 흐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올바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당연한 것인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해야 한다. 나는 당연히 죽는다. 따라서 나의 삶은 당연히 소중하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은 당연히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인생은 여유롭게 시간의 흐름을 느끼면서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 나에게 잘못이 없다면 괜히 불안해하거나 걱정하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열심히 근무하고 나서 피곤하면 일찍 퇴근하는 것이 당연하다. 소질과 흥미가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을 갖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다. 자신에게 천직 같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일하면서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당연함'의 끈을 놓치지 않고자 '다수'를 의심한다. 그 다수를 따라하는 나의 행동을 의심한다. 내가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은 '해도 되는 일',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약, 정말로 만약에, 내가 다른 사회에서 태어났다거나 다른 시대에 태어나서 지금과는 여건이 조금만 달라졌더라도, 이를 '정신 나간 일'이나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긴 세월이 지난 후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늙어버린 자신에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노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지금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떻겠는가? 
 
  카페에서 줄을 서다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의심의 눈초리로 눈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자. 그들도 같은 것을 잃어버렸는지도, 아니,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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