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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知圖)

글을 쓸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쓴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글쓰기는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이다. 
 
  평소에 관심이 있던 이성과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다. '말을 걸까 말까?'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 어떡하지? 그래도 그냥 지나쳤다가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지?' 내 소개부터 해야 하나? 인사를 하고 나서 날씨 얘기를 할까? 우리가 같이 겪었던 일이 뭐가 있더라?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말하지?' 자신감과 확신에 찬 것처럼?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좋겠어. 그래야 상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꺼야... 이렇듯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말을 할 것인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세 질문에 답한 셈이 된다. 
 
  세 질문 중 앞선 질문은 다음 질문의 전제가 된다. 말을 걸어야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할 수 있고, 말할 거리가 있어야 어떻게 말할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전혀 대화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상대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할지, 어떻게 말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선 질문이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서 다음 질문이 성립할 수 있다. 즉, 앞선 질문의 답은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의 영역을 한정한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대화의 소재도 그만큼 풍성해진다. 반면, 업무상으로 만나게 된 사람과 처음부터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다. '말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강도에 따라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의 영역이 제한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쾌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에 따라서 어떻게 말할지가 제한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 단계의 질문에 대한 선택권을 가질수록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누리게 된다. 회의 자리에서 안건에 대한 의견을 말하라고 요구 받는다면 우리의 자유는 많이 제한된다. 우리는 안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야 한다. 안건이 아닌 점심 식사 메뉴 따위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선택권만 갖게 될 뿐이다. 지인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상황은 이보다 훨씬 자유롭다. 내가 무엇에 대해 말할지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 이야기, 여행 갔던 이야기, 쇼핑 했던 이야기 등등 많은 소재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말할지에 대해서도 선택권을 갖는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 함께 있는 상황은 이보다 더 자유롭다. 이번에는 말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침묵이 용인되는 상황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말하기에 있어 최고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글은 말을 적어 놓은 것이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는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글의 경우에는 이 세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과정이 더 신중하게, 더 긴 시간을 들여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말의 경우에는 세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대화에서는 별 생각없이 자연스럽게 말을 하게 된다. 의식을 하더라도 세 질문을 순차적으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을 말할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서 그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기도 한다. 그리고 세 질문 중에서 일부에 대해서만 선택의 권한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나 내 뜻과는 상관 없이 대화 소재가 결정되는 경우를 자주 겪는다. 글쓰기도 물론 그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글쓰기에서는 내 의지만으로 흰 종이 위에 아무런 제한 없이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세 질문에 대한 답에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상태가 된다. 말의 경우에는 이러한 상황이 드물다. 
 
  세 질문 중에서 '글을 쓸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이 질문은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글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글을 쓰려는 경우가 있다. 자기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 이를 표현할 수단이 글밖에 없거나 글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에 의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 쓴 글은 적어도 그의 삶, 더 나아가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는 소재를 다룬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해당하는 표현 방식이 조금 서툴 수는 있다. 그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서툴게, 그러나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역사와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의미 있는 경험이다. 반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다. 유명세를 타고 싶다거나,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무엇을 쓸 것인가'에 해당하는 글의 주제에서 필연성을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저자는 독자의 입장을 생각하거나 자신의 삶과 시대를 성찰하기에는 너무 조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얼른 성과를 내서 인정을 받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이미 알려져 있거나, 유행을 끌고 있거나, 아니면 독자의 주의를 끌만한 것들을 소재로 선택하기가 쉽다. 반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해당하는 표현 방식은 화려한 경우가 많다. 별 것도 아닌 것에 대해서 미사여구와 유려한 화법으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에 이용당하기 쉽다.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저자가 원래 의도했던대로 그의 유명세를 강화시키고 그의 통장을 두둑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도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읽기 전후로 내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만큼 그 책이 우리의 삶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글을 읽을 때는 첫 번째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은 글쓴이의 사람됨, 인간성,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글쓴이의 정체성에 해당한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그의 정체성을 느끼는 것은 그 만남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인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이 사람의 말은 진실인가?' 그의 옷차림이나 말투, 표정 등은 모두 부차적이다. 마찬가지로 글의 핵심은 그 글을 쓴 이유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저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고, 무엇에 좌절하고 슬퍼했는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글이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쓸 때도 첫 번째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의 답은 글의 유전자가 되어 글의 운명을 상당부분 결정짓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의 답에도 큰 영향력을 끼친다. 그리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분노하고 좌절했는지, 무엇에 기뻐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당연히, 이러한 성찰은 글의 뼈대가 된다. 이것이 잘 되어야 글 속에 자기 자신이 담긴다. 비로소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글을 통해서 독자가 나를 만나게 된다. 글이 존재하는 이유인 ‘자기표현’이 실현된다.   
 
  좋은 글은 필연성을 갖춘 글이다. 필연성이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다른 것들이 아닌 바로 그것에 대해서, 다른 수단이 아닌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분명한 이유를 말한다. 바로,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확신에 찬 대답이다. 필연성을 가진 글은 자연스럽다. 이미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풀어내면 된다. 억지로 좋은 소재를 찾거나 멋진 문장을 애써 짜낼 필요가 없다. 표현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선에 그쳐도 된다. 필연성을 가진 글은 유익하다. 애초에 그가 필사적으로 말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당연히 새로운 생각이나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속한 시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야기는 타인과 스스로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글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은 필연성을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를 통해 자기 영역을 확장하려는 스스로의 욕망을 살필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 욕망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없앨 수는 없다. 또한 실제 글쓰기에서는 다양한 욕망들이 뒤섞여 동기와 목적을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본질적인 이유가 자기표현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수정 : 202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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