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도(知圖)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이 공간에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물음을 던질 때, "이렇게"의 의미가 모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 질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1. 적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을 하며

 -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적성을 딱히 크게 고려한 것 같지 않다. 혹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청소년기부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진로 교육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 취업 과정에서 선택의 폭이 좁았던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높은 청년 실업률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 현재 일을 하고 있거나,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아 실현'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회복탄력성』에 언급되었듯이, 우리는 강점을 발휘할 때 행복해 질 수 있다. 

 

 

2. 긴 시간 일을 하면서

 - 북유럽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에 비해 우리나라 근로자는 매우 긴 시간 일한(기사 참조 : 

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newsview?newsid=20151129190532648&p2m=false

). 독일의 2014년 근로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1371시간인 것으로 나와 있다. 52주로 나누면 주당 26.4시간, 이를 다시 5일로 나누면 하루에 5.3시간이 된다. 휴가로 쉬는 날을 감안하면 하루 평균 6시간 정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9시에 출근해서 점심시간 1시간을 근무시간에서 제외하면 오후 4시에 퇴근을 한다는 이야기다. 나와 내 주변사람들만을 놓고 본다면, 그리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이 근무시간은 나와 내 또래의 근로자들 근무시간의 2/3 혹은, 1/2 수준, 경우에 따라서는 1/2 이하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노예"는 아닌지 살짝 의심이 간다. 저 기사의 댓글들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과연 푸념 섞인 과장일 뿐일까. 

 

 

3. 외롭게

 - 내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일과 관련해서, 흔히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나는 나의 심리와 성격,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숙고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제도에도 관심이 있다. 이 관심이 경제학, 그리고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는 것 같다.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은 각자에게 상당한 긴장감과 정서적 불안감을 유발하는 것 같다. 이것이 사회적인 현상이라면, 우리는 큰 비용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 우리는 상당히 많이 외로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우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심리학의 논의들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4. 과정과 현재를 무시하며

 - 우리는 실적이나 결과로 평가를 받는다. 취직을 하려면 대학에 가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취직을 해야 하고, 직장에 계속 다니려면 실적을 내야 하고, 승진하기 위해 직장에서 좋은 평을 들어야 한다. 과정이나 현재는 무시되기 쉽다. 힘이 든다. 힘들어도 참아야만 한다. 우리의 삶은 현재의 모임인데 언제까지 현재를 희생시켜야 하는가? 

 -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휴일에, 얼마나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얼마나 위해주고 있나? '~를 하기 위해서는 ~를 해야 해'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에 익숙하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사는 삶은 '냉혹한 현실에서의 생존'을 위해 미래로 미루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5. 맹목적으로

 - 4번과도 관련이 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스스로 대답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까봐 다른 사람처럼 산다. 나는 출근길에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에게서도 이러한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의 무표정에서도 이런 점을 읽는다. 억지로 자신의 일을 하는 동료들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을 본다. 왕따 현상에서도 이런 면을 본다. 나는 독일 나치의 과오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본다. 이것을 나는 연극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불교 티비에서 들었던 화엄()과 정확이 반대되는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이렇게"란 "행복하지 않게",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억울하지 않은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가? 삶을 그렇게 가벼이 여겨도 되는가? 저항, 저항할 수 있을까? 

 

 

(작성 : 2016. 2. 21.)

'지도(知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춘의 끝자락에서  (0) 2018.11.07
동의와 문맥  (0) 2018.11.07
생존의 띠  (0) 2018.11.07
어느 휴일 저녁에  (0) 2018.11.07
나의 연극  (0) 2018.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