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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쓰는 글

상추씨

  티끌처럼 가벼운 상추 씨앗을 심으면 금새 자라서 손바닥 만한 잎이 달린다. 계속 키우면 무릎 위까지 높게 자란다. 손바닥보다도 큰 이파리가 빼곡히 달린다. 먼지 같은 씨앗 하나가 이렇게 크게 자라는 것도, 이렇게나 많은 상추 잎이 생겨나는 것도 신기하다. 그러다가 꽃이 피고 씨를 맺으면서 시들어 버린다. 상추 한 포기가 시들어 사라지는 것은 그리 아쉽지 않다. 애초의 그 작은 씨앗 하나를 떠올린다면, 이 상실은 상추씨 하나를 바람에 날려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무게감을 가질 뿐이다. 그리 아쉬울 것이 없다. 

 

  나 역시 티끌보다도 작은 하나의 세포에서 비롯되었음을 상기한다면, 내가 태어나서 성장했다가 시들고 사라지는 것도 그리 대단한 일은 못되는 것 같다.

 

  물론 사람은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 없이는 자랄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과 사건의 총합이다. 그러므로 '나'를 최초의 수정란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와, 겪었던 모든 사건의 영향을 '나'라는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존재를 지칭하기 위해서 '나'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 독자성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정란 하나를 만나게 될 뿐이다. 따라서 '나'라는 개념은 나를 지칭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인생, 삶, 운명... 이러한 단어들은 하나의 수정란에게 쓰이기에는 너무 거창하다. '나의 인생', '나의 운명'같은 거대한 것들이 일상을 짖누를 때면, 그것들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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