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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知圖)

진실의 편안함

  나는, 어린 시절에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었듯이, 직장에 다니면서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은 이런 일들을 도대체 왜 해야 하는 것일까...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일을 하는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할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나의 마음은 항상 불편해졌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을 그냥 해야만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적어도 나는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그 일이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나는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는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돈 벌려고 일을 한다'고 단순히 생각하고서 그냥 주어진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왜'라는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다. 나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 나는, 돈 이상의 어떤 의미나 이유를 취할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착각이었다. 어느날 퇴근할 때, '나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다닌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그것은 진실을 마주할 때의 편안함이었다. 그렇구나. 나도 똑같구나. 나도 그저 공장에 나가서 시키는 일 하는 사람이었구나. 나도 그저 노동자구나. 돈을 벌기 위해 내 삶의 대부분을, 내 삶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청춘을 서류와 전화 소리, 조마조마하는 마음에 흘려 보냈구나. 돌아가는 것이 공장 기계가 아니라 컴퓨터로 바뀌었을 뿐, 나도 부속품에 불과하구나.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구나. 이런 생각은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었다. 그 단순함이 주는 단단함, 그리고 그들처럼 나역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안겨주는 더 묵직한 슬픔이 함께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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