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그리 말랑말랑한 줄 알아?"
"점마들 사는 세상은 데모 몇 번 한다고 바뀌는 그런 말랑말랑한 세상이야? 내가 살아온 세상은... 하! 데모로 세상을 바꿔? 니미 뽕이다."
"데모를 해가 바뀔 세상이면은 내가 열두 번도 더 바꿨어. 세상이 그리 말랑말랑한 줄 알아?"
- 영화 <변호인> (양우석 감독, 2013) 중
나는 주인공인 송우석(송강호 분)의 이 대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숱한 고난의 세월을 겪어 온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반발심이 일어난다. 나는 "만만치 않은 세상", "각박한 세상", "먹고 살기 힘들다"와 같은 표현들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분명 살기 힘든 세상인 것은 맞다. 하루하루가 고되고 답답하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그러하고, 아주 극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쉽게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발언들이 사실을 상당한 정도로 담고 있지 않으며 발화자의 태도 또한 그렇게 진실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사람들'을 뜻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할 때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행동이다. 여기서의 행동은 아침마다 기지개를 켠다거나 왼손으로 전화를 받는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행동들이 아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뜻하는 사회적 행동이다. 따라서 송우석이 "말랑말랑하지 않다"고 한 것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 것도 모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대하는 방식,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대하는 방식, 혹은 약한 자가 약한 자를 대하는 방식이 냉정하고 잔인하며, 이러한 인간 관계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행복이나 고통을 느끼는 구체적인 경험은 항상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비정규직을 폭넓게 허용하는 제도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를 '비정규직에 관한 법과 시행령 등 종이에 적혀진 몇 개의 문장들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고통은 항상 구체적인 경험에서, 그리고 대부분은 작은 상황들에서 나온다. 여기 사무실을 청소하는 비정규직 직원이 있다. 그가 느끼는 고통은 상급자가 반말을 하거나 힘들어서 잠시 쉬는 꼴을 못 보고 닥달을 한다든지, 정규직 직원들이 자신을 하대하거나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적은 보수 때문에 생활이 힘들다는 점도 큰 고통일 수 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겪는 고통도 대부분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형태로 현실화 된다. 그 직원이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않았거나, 치료비가 부담이 되어서 병원에서 발걸음을 돌렸다고 해보자. 그는 치료를 받지 못해서 지속되는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격체와 생명체로서 받아야 할 기본적인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주는 비참함과 서운함, 소외감도 큰 고통이 된다. 물론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상황도 있다. 식료품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면 배고픔에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인간 대접을 못 받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황도 많다.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앞의 사례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임금을 대폭 올린다고 가정해보자. 경제적인 여건이 나아지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상황은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인간 대접을 못 받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도 줄어들 것이다. 제도의 변화가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기고, 이것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하는 일이 더이상 비정규직이거나 저임금을 받는 일자리가 아니구나'라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 사람들은 그를 예전처럼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상급자가 반말을 하거나 초과근무를 지시하거나 낮은 사람 취급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이라는 영역이 꼭 제도의 영향만 받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을 폭넓게 허용하면서도 정규직과 같거나 오히려 더 많은 급여를 주는 사회도 있다. 우리 사회에도 적은 임금을 받는 직원들을 더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직장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역은 일종의 문화적인 성격이 있다. 어떤 집단이나 사회에서는 직급이 낮은 사람이나 급여가 적은 사람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문화가 있고, 어떤 집단이나 사회는 그렇지 않은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청소하는 직원을 무시하거나 하대한다고 치자. 그를 그렇게 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스스로 '적은 급여를 받고 있는 비정규직 직원은 무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문화가 그렇듯이, 이러한 태도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학습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대하니까 나도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자신들도 그렇게 하는 것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공통의 행동 양식, 이것이 바로 문화이다. 그리고 이 문화의 성격이 역으로 법과 제도에 반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의 비정규직 관련 법과 제도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의식과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이 영역의 문화가 상당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작위적이라는 말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반드시 그러해야 할 필연적인 사유가 없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문화는 필연성과 임의성을 동시에 갖는다.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농경사회라서 소의 역할을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화권의 사람들이 소고기가 아닌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설령 그것이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든, 외부인은 그게 그들의 문화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문화에는 어느정도 우연성이나 임의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임의적인 성격이 강한 것 같다. 오랜 군사 문화와 유교의 잔재 때문에 서열을 명확히 정하려 하고 낮은 직급의 사람들을 하대하는 문화가 다른 사회보다 강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문화가 생길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이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유교와 군사 문화의 유산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위계적이고 착취적인 문화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세계 그 어느나라보다도 교육열과 교육 수준이 높다. 충분히 이러한 문화를 청산하고 합리적으로 개선할 역량과 여건이 있음에도 그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한국 사회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뚜렷한 근거나 기초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관계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그다지 견고하거나 튼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겉은 단단해 보이지 곳곳에 균열이 나있고 속은 비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지위나 서열, 혹은 관계에 붙여진 이름에 따라 미리 정해진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탁월하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해야 할 역할, 당신이 해야 할 역할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고 거의 모두가 이를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관계와 그 양상들이 겉보기에는 매우 견고하고 튼튼해 보인다. 그러나 순간순간 그 껍질 사이의 균열과 틈새가 발견된다. 균열의 대표적인 예는 '어색한 침묵'이다. 직장 동료나, 지인들끼리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를 생각해보자. 혹은 같이 차를 마시고 있다고 치자. 한창 시끄럽게 떠들다가 화재가 끊어지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1초 미만, 때로는 수 초의 침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다들 '무슨 말을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이야기 할 것을 생각하느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상대방과의 관계의 실체, 그것의 내실(內實)이 드러난다. 침묵의 순간이 어색하면 어색할수록 상대방과의 관계가 의례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음을 반증한다. 어색함과 당혹감은 내가 '침묵의 순간 드러나는 내 본래의 모습과 분위기,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를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비롯된다. 이는 내가 상대방을 '내 본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그 동안에 화기애애하고 유쾌하게 이야기했던 것은 하나의 연출이다. 나는 배우가 되어 연극에서 주어진 대본대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연기하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는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로 구성된 사회에 비해 그리 단단하고 튼튼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본능에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취향이 변하지 않는 이상 행동이 변화하지 않지만, 연기하는 자들은 대본이 바뀌면, 즉 상황에 따른 행동 규범이 바뀌거나 바뀌었다고 여겨지면 재빨리 행동을 바꾸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삶의 태도, 또는 두 가지 모습의 사회를 나타낸다. 하나는 자신의 본능에 따르는 사람들로, 이들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에 스스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렇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존중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는 개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을 대체적으로 포용한다. 그들의 사회가 개인 각자에게 자기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허락한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정반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세워 놓은 기준, 혹은 그런 기준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자신을 맞추기에 바쁘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에 익숙하다. 자기 의견을 말하라고 하면 상당한 압박을 느끼면서 말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사실 잘 모른다. 그래서 자기를 존중하거나 표현하는 데에 어색함과 어려움을 느낀다. 이들은 자신의 의견이 무시당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도 충분히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을 모른다. 누군가가 특이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집단 안에서 눈에 띄면 '재는 왜 저래'라며 집단적인 압력을 가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처벌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목표는 생존이지 자기 표현이 아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기에는 삶이 너무 고달프고 척박하다고 느낀다.
나는 한국 사회가 후자에 가까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사실, 후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일본 사회가 1위, 한국이 2위 정도 하지 않을까 싶다.) 그 근거는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다. 그저 나 자신을 돌아보면 된다. 내가 오늘 하루 속으로는 싫으면서 이를 표현하지 않고 억지로 해야만 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색한 자리에서 어색함을 피하려고, 침묵을 지우려고 쥐어 짜낸 말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러한 '연극에 기반한 사람 대하기'는 개인 차원을 넘어서며, 한국 사회에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다. 여기 국회의원이 한 명 있다. 한 음식점에서 그와 마주치는 사람, 그를 알아보는 사람마다 그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다. '왜 이래야 할까?' 그는 우리를 대리하는 사람이지 우리를 지배하는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에게 어떠한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지 여부에 대한 답을 하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단 허리를 굽힌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렇게 행동한다면,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어깨를 더욱 한층 더 부풀릴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지위가 안겨주는 안락함에 더 도취되게 할 것이다. 그가 국회의원이 아니라 회장님, 부장님, 시장남, 군수님, 시의원님이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그 위치에 있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 허리를 굽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아서 긴다."
높으신 분들의 차는 누군가가 대신 운전해준다. 차 문도 저절로 열리고 닫힌다. 출입문도 마찬가지다. 커피도 저절로 타진다. 말 한마디, 손 가락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 이보다 더 쉽고 편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갑질을 하지 않을래야 안 할 수가 없다. "왜 운전을 스스로 하면 안 되나요?" "왜 차 문을 스스로 열고 내리면 안 되나요?" "왜 출입문을 자기 손으로 열면 안 되나요?" "왜 자기가 미실 커피를 자기가 타면 안 되나요?" 이런 질문을 소리 내서 할 기회는 없다. 이런 질문은 연극 대본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본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스스로에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자'는 '이미 적응해버린 자'를 뜻한다. 주어진 여건과 사회적 관습에 이미 적응을 해버린나머지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이는 '적응을 하지 못한 자'를 상상해보면 분명해진다. 다른 문화권에서 이방인이 한국을 방문했다고 치자. 그가 살던 사회는 매우 평등하고 민주적이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송우석이 겪었을 법한 고생이나 차별을 마주한 순간 "왜"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질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왜 저들은 저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이런 질문 속에는 그러한 대우가 정당하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 반면, 송우석의 태도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자'의 전형이다. 그는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 지에 대한 생각을 이미 포기해버렸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 말랑말랑한 세상이 아니야"라는 그의 외침은 "더이상 정의가 무엇이고 부당함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더이상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발언들이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의 위력과 파급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해 아직 어떠한 입장이나 주관이 없는 사람들, 특히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에게 송우석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하다. 청년들에게 세상이 각박하다는 발언은 세상이 각박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쉽게 바꾸려고 시도하지 말라는 경고로 들릴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은 각박하다"는 설명은 "세상은 각박해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하게 기능한다. 이는 언어가 지닌 무서운 위력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지옥은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젊은이들이 왜 공무원 시험에 몰두하는 것일까?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가 왜 공무원일까?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송우석의 말과 같은 발언들이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은 극심한 경쟁을 직접 현실화함으로써 그 발언들은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푸념이 아니라 자기 표현이다. 연극 대본을 찢어버리고 뛰쳐나와 자기를 표현을 할수록, 세상은 더 말랑말랑해질 것이다. 미리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세상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빈틈이 많다.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다. 저 당당해 보이는 자는 그저 다른 사람을 따라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는 예전에 당당한 사람을 보고서는 열등감을 느꼈고, 그의 지위와 여건에 스스로가 가까워지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지위와 가까워졌다고 여겨지자, 그 사람을 따라하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의 거의 모든 사회적 행동들이 마찬가지다. A는 B의 눈치를 보고, B는 C의 눈치를 보며, C는 D를 따라하고, D는 E를 따라하고 있다. 아무런 원본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한 대의 복사기가 되어 열심히 사본의 사본을 복사하고 있을 뿐, 그 무엇도 창조하거나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사회는 크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아무런 본질이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표현'은 '자기 존중의 표현'이며, 오직 자기 존중을 통해서만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상급자가 반말을 해서 기분이 언짢으면 기분이 언짢다고 말을 해야 한다. 이 말을 통해서 나는 상대방에게 '나는 나를 매우 존중하므로 당신도 나를 존중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이러한 메시지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식하고 대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힘들어서 조금 쉬고 싶어요." "술을 더 먹고 싶지 않아요." "일이 너무 많아서 부담되네요." 이러한 발언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정당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발언들이 모여 연극의 대본을 서서히 찢고 무대에 균열을 내며 결국에는 그것을 무너뜨린다.
세상은 말랑말랑하지 않은가?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보기보다 허술하고 빈틈이 많다. 때로는 통째로 사기(詐欺)인 것 같다. "내가 사는 세상은 그런 말랑말랑한 세상이 아니야"라고 선언하는 순간, 당신은 그것이 사기인지 여부에 대한 의심을 그만 두는 것이고,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사고를 그만 두는 것이며, 그 어떤 변화의 가능성도 닫아버리는 셈이 된다. 이것을 삶과 세계에 대한 진실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골치가 덜 아플 수는 있겠다. 그러나 결코 자유로운 삶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