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W TO READ 마르크스》

피터 오스본 지음, 고병권·조원광 옮김, 《HOW TO READ 마르크스》, 웅진지식하우스, 2007.
마르크스의 저작을 다루고 있으니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철학적 개념에 대한 설명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면서도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다시 읽는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책도 많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서양철학에 관한 책임을 고려하면, 이해하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은 편이다. 이 책의 저자가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용어가 매우 중요한 열쇠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양(supersession)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주요 의미가 있는데, 이 세 가지 모두 헤겔이 사용한 그대로다. ① 상승시키기(raise), 고양시키기(lift up), ② 무화하기(annul), 폐지하기(abolish), 파괴하기(destroy), 취소하기(cancel), 중단시키기(suspend). ③ 보호하기(save), 보존하기(preserve). 변증법적 지양은 어떤 것을 그 현존 형태 안에서 중단하거나 폐지함으로써-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형태 속에 그 어떤 것은 보존된다-더 높은 힘으로 고양시키는 과정이다. [다른 한편] 전유는 소외된(alienated, 외화되어 결국 낯설게 된) 어떤 것이 회복되거나 되찾아지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 헤겔이 사용한 단어다. 만약 소외가 인간에 대한 부정이라면, 전유는 ‘부정의 부정’이고,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귀환이다. 인간의 자기소외(self-estrangement)로서의 사적 소유의 부정은, 오로지 그전에 소외된 인간의 본질을 전유할 수 있을 때에만 사적 소유의 부정이 될 것이다. (127쪽)
저자는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양’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세 가지로 분석한 후, ‘변증법적 지양’에서 이 세 가지 의미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보인다. 이를 통해 우리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논의에서 왜 ‘지양’이라는 단어가 쓰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또한 마르크스가 사용한 특정 (독일어) 단어의 어원까지 설명하면서 그것이 영어로 잘못 번역된 사례를 들기도 한다. 역자들 또한 번역을 통해 의미 전달이 어려울 듯한 단어는 괄호 안에 영어 원문을 표기해 주었다. 이렇듯 언어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설명은 책 읽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이 책의 특징은, 저작물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의 특징과 창작 과정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의 글쓰기 전략에 대해 언급한다.
놀랍게도 이 서문은 정치적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가’를 다룬 <에피쿠로스 철학에 관한 노트>의 단락을 체계적으로 재사유하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 사유의 통일성이 부분적으로 과거 미간행 텍스트들을 지속적으로 재작업한 결과로 얻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마르크스 저작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그가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하고 있음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감과 참조의 목적에서만이 아니라 이미지들과 구절들, 텍스트 질료 자체의 원천으로서 자기 자신의 옛 원고들과 노트들로 되돌아간다. (108쪽)
《선언》이 가진 당대의 중요성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두 측면, 즉 역사적 변화의 담지자인 사회 계급들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라는 측면과 매우 놀라운 문학적 성취라는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 절정에서 《선언》은 역사 자체를 경험하는 것과 동등한 경험 구조를 독자 안에서 생산해낸다. 즉 역사적 주장을 이미지적으로(imagistically) 제시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136쪽)
선언이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실행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미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독자를 특정한 미래로 향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런 목적성은 특별한 종류의 문학적 절대주의-절대적 현재라는 시제의 사용-로 자신을 현시한다. 여기서는 바라는 바가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 마치 이미 이루어진 양 제시된다. ······ 여기에 선언 형식이 갖는 허구와의 유사성이(또한 차이가) 있다. 이는 선언이 항상 미래에 대한 선취(pre-emption), 도박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선언은 그것이 그리는 미래를 확실한 것인 양 쓰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는 그 미래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이 필연적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오랫동안 비판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마르크스의 실천으로서의 언어 사용을 과학적인 예견인 양 오해한 것이다. (140~141쪽)
만약 마르크스가 똑같은 내용을 선언 형식이 아닌 설명문이나 편지글 형식으로 썼다면 《선언》이 끼쳤던 영향력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설득할 때 말의 내용보다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다. 내용보다도 문체와 형식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따라서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의 영향력까지도 깊이 있게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글이나 발언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느껴질 경우에도, 그 설득력이 내용의 신빙성과 논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글의 형식이나 발화자의 태도에서 나온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마르크스의 저작에까지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이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HOW TO READ' 시리즈의 목적인 것 같다.
문장이 대체적으로 길고 쉽지도 않다. 한 장(章)이나 문단이 일관성 있게 꽉 짜여진 구성은 아니다. 저자는 소개하고 싶은 글 한 토막을 걸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용된 글을 구구절절이 해석해 주지도 않는다. 자유롭게, 마치 대학 강의처럼 이야기를 해나간다. 때로는 슬쩍 지나치고 때로는 깊이 있게 논의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한 인식을 좀더 풍성하게 해주는 책이다.
(작성 : 2012. 1. 8.)
(수정 : 2023.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