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건축학개론》

Binaural 2023. 3. 9. 00:35

이종건,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건축학개론》 ,ACA, 2020.
 
  책에 관한 지금 내 입장은 어린 시절과 상당히 다르다. 예전에는 '글을 읽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내 잘못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애를 썼다.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지금은 다르다. 글을 집중해서 읽었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내가 아니라 글쓴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원인은 대개 두 가지다. 관념적이고 전문적인 용어에 의존해서 글을 썼거나, 좋지 않은 문장으로 글을 쓴 경우다. 신기하게도 보통은 두 가지 문제가 함께 나타나는데, 사실 그 원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로 '배려의 부족'이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뒷전으로 밀려난 이유는 글쓴이의 욕망이 너무 앞섰기 때문이다.  
 
  글은 의사소통 수단이다. 글쓴이와 읽는이 사이에 소통이 잘 되는 글이 좋은 글이다. 그러나 뽑내고 싶은 욕망, 잘나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의 주된 동력이 되면, 글쓴이는 독자를 의사소통의 파트너가 아니라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관객쯤으로 전락시키고, 자신은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설교를 하게 된다. 설교는 소통이 아니므로, 어려운 글은 결코 좋은 글이 아니다.  
 
  이 책은 칸트, 헤겔에 대한 철학서처럼 무지막지하게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읽기 어렵다. 관념적이고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을 주석도 없이 마구 썼다. 문장도 좋지 않다. 책 제목이 "개론"인데, 건축과 철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런 개론을 읽으면 안 될 듯 싶다. 
 
  알베르티가 부여한 건축가의 '창조자' 곧 작가(의 의도)의 중요성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구조주의의 출현, 좀 더 특정하게는 바르트(Roland Barthes)의 텍스트성(textuality)과 문학비평의 수용이론 등의 영향으로 급격히 약화되고 부정되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무의식 개념,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철학 등이 야기한 현대적 주체의 불가능성은, 작가로서의 건축가의 정의를 뿌리째 흔들었다. (43쪽)
 
  나는 바르트의 텍스트성이 무엇인지 모른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현대적 주체의 불가능성"은 어떤 뜻인가. '현대에 와서는 주체가 스스로의 의지로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라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그건 또 무슨 의미인가? 아주 오래전, 철학 시간에 들었던 듯한 개념이 떠오르려다가 가라앉는다. 나는 굳이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까지 이런 문장들을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어려운 용어가 없는 문단도 이해가 어렵다. 문장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문단을 읽어보자. 
  
  건축작품을 판단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과제는, '기준들 간의 가치의 우열'에 대한 판단이라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 뿐 아니라, 건물의 성격과 그것이 위치한 상황을 포함해 '지금여기' 어떤 방식으로 적실한지, 그것을 현실과 대질시키는 일이다. 예컨데 단순히 아름다움이 아니라 '어떤' 아름다움인지, 곧 오늘날 우리 상황에 가치 있는 아름다움의 방식 혹은 양상을 찾고 해명하는 작업이다. (112쪽)
 
  나는 위 문단을 읽고 또 읽어서 아래와 같이 고쳐 보았다. 
 
  건축작품을 평가하려는 사람은 각각의 평가 기준이 측정하려는 가치 중 어떤 것이 우월한지 따지는 데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에서 건물이 가지는 위상에 적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치를 '지금 여기'의 현실과 대질시켜 보면서 그것의 적절한 양상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이 윤리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어떤' 아름다움이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가치있고 적절한지를 고민해서, 그 아름다움이 건축 속에서 표현될 수 있는 방식과 양상을 밝혀야 한다. 
 
  내가 본래의 문단을 제대로 이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고친 문단도 더 이해하기 쉽게 바뀔 여지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론'이라 이름 붙일 책을 쓰려는 사람은, 독자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최소한 이 정도만큼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현 방식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나는 저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건축작품은 판단을 거치기 전까지 사물에 불과하고, 판단은 건축작품과 관계되기까지 관념에 불과하다. 이 둘은 서로를 요청하며,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향의 관계다. 둘이 좋은 관계를 이룰 경우, 건축작품은 판단, 특히 탁월한 판단에 의해 더 좋은 혹은 풍성한 존재로 나아가고, 판단은 건축작품, 특히 탁월한 건축작품 덕분에 더 생생한 현실성을 얻는다. 건축작품은 새로운 지각과 인식을 얻고, 판단은 더 큰 호소력을 얻는다. 건축가는 비평가로부터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비평가는 건축가로부터 현실의 실천적 지혜를 배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건축작품과 건축판단 둘 모두 질적 탁월성을 갖는 것이다.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탁월할 때 피차 더 큰 독립성을 획득하고, 그로써 서로를 살찌우며 건축이라는 이름의 문화를 고양시킨다. (117~118쪽)
 
  나는 위 문단을 읽고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비평가를 건축가와 대등한 위치에 놓고 싶었던 것이다. 건축에 대한 상냥하고 친절한 설명은 하지 않고, 철학과 미학에서 나온 용어들로 책을 가득 채운 것은 건축계에서도 미술이나 다른 예술분야와 비슷한 비평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건축계에서 자신을 포함한 비평가의 지위를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나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 친절한 설명과 구체적인 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판단'이라는 용어를 '비평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비평가'를 '판단'의 주체로 여긴 것이다. 그런데 비평가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건축물을 보고 얼마든지 느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 역시 건축가가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건축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일반인들도 작가(건축가)의 의도와 작품(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별다른 도움 없이 충분히 인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축은 '몸소 체험하는 것'이 감상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마치 요리와도 비슷하다. 일반인이 요리를 눈으로만 보고 판단해야 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 맛을 볼 수 있다면 전문가는 그리 필요치 않다. 건축도 그렇다. 건축은 눈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안과 밖을 거닐거나 직접 생활하면서 맛을 볼 수 있다. 눈으로만 판단하는 경우에도, 건축은 현대 회화나 조형 미술처럼 난해하고 기교 가득한 예술과는 다르다. 건축물은 사람이 그 안에서 지내면서 실생활에 쓰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극도로 난해한 기교와 장식이 쓰이거나, 이해가 어려운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판단은 비평가의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축가가 "사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비평가에게 의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창작자는 자기 창작물의 의도, 의미, 의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평가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비평가는 예술작품에 대해 특정한 판단 기준과 관점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 기준은 항상 옳은 것도, 꼭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문가 집단과 대중에게 승인되어야만 한다. 승인 과정에서는 기준이 얼마나 합당한지뿐만 아니라 비평가의 권위도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된다. 특히 일반인들은 비평가의 권위만 보고 그가 제시한 기준을 승인해버리곤 한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은 스스로의 판단과 느낌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다. 이렇게 비평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으로부터 예술을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을 건축으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건축은 예술이면서도 손에 닿는 곳에 있다. 사람들에게 생활의 일부이면서도 감동을 준다.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고 크기 때문에, 형태, 양감, 질감, 공간감을 비교적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보고 경험하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건축은 늘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친다. 이런 것들이 건축의 본질이다. 그래서 평생 '모나리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있지만, 건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표지에 있는 "건축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부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의 많은 문장들이 이와 비슷하다. 쉼표와 "혹은"으로 꼬리를 물고 있다. 저자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은 듯한 정돈되지 않은 이 책의 문체가 부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저자는 이 책을 사람들이 건축에 다가가게 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건축을 소외시키려고 쓴 것 같다는 점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저자 중심적이다. 책 제목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한 건축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