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주대환,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 나무+나무, 2017.
강의 녹취록을 책으로 낸 것이다. 저자가 수정과 보완을 했지만 강연하는 말투를 그대로 실었다. 마치 저자가 내 앞에서 말로 설명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읽기 편하고 이해하기 쉽다.
저자는 한국은 원래 평등한 나라로 출발했다고 말한다. 1945년 광복 후, 남, 북한 각각에 단독 정부가 세워졌다. 대한민국에서는 1949년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농지개혁이 마무리 되었다. 일제 때부터 지주로 군림했던 자들에게서 땅을 유상으로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했다. 농민들은 땅값으로 향후 5년 동안 생산량의 30%를 내면 되었다. 이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었다. 수 백년, 아니 어쩌면 단군조선 이래 소작농을 벗어나지 못했던 농민 대중들이 드디어 자기 땅을 갖게 된 것이다. 1950년대에는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해방 당시 85퍼센트의 농민이 소작농이었습니다. ······ 당시에는 국민의 70퍼센트가 농민이었습니다. ······ 거의 모든 국민이 농민이었다는 말입니다. ······ 85퍼센트가 소작농이었다는 말은 소작농이 전체 국민 가운데 절반 이상이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분들을 대대로 소작농이라는 천형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이 1949년의 농지개혁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원래 토지혁명이란 것이 쿠데타나 혁명의 슬로건으로 자주 등장하나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 필리핀 보십시오. 많은 정변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 나라는 대지주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 정도전이 토지혁명을 외쳐 빈농들의 지지를 받아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웠으나 실제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지주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기당한 것이지요. (23~24쪽)
저자는 농지개혁이 이후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Deininger, K. (2003). Land policies for growth and poverty reduction. A World Bank Policy Research Report, 18. Retrieved from https://books.google.co.kr/books?id=-3HWZigoZDMC&printsec=frontcover&hl=ko&source=gbs_ge_summary_r&cad=0#v=onepage&q&f=false
가로축은 초기(initial-이것이 1960년을 가리키는지는 해당 논문을 찾아봤지만 분명치 않다)에 토지가 얼마나 평등하게 분배되었는지를 나타낸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평등하다. 세로축은 1960년에서 2000년 사이에 경제 성장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를 나타낸다. 토지가 평등하게 분배되었던 나라일수록 경제가 크게 성장했다. 한국은 농지를 가장 평등하게 분배했던 나라였는데, 타이완을 제외한다면 경제성장률도 최고를 기록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대지주들이 거대 농장을 소유해왔던 나라들은 경제성장률도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작농에서 자작농이 된 한국의 농민들은 자부심과 함께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남미 나라들처럼 땅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농업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비록 남의 땅이었지만 스스로 판단해서 농사를 지었던 소작농이었기 때문에, 어떤 땅에 무엇을 심어야 하고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생산량이 많은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능력있는 그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자, 이제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했다. 논두렁, 밭두렁의 손바닥만한 땅도 놀리지 않고 작물을 심고 가꾸었다. 자식 교육에도 열성이었다. 농사로 번 돈을 아끼고 모아서 자식 한 둘은 대학에도 보낼 수 있었다. 한국 국민들의 부지런함, 성취욕, 높은 교육열은 그렇게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맥시코에서는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나서 두 번의 농지개혁을 실제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10년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농민들이 땅을 지주에게 팔고 다시 농업 노동자로 들어갑니다. 농민들에게 경영 능력이 없으면 땅을 나누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 자기 책임하에 독립적으로 경영을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소작농은 남의 땅을 빌리지만 경영자였습니다. 그래서 땅을 분배받았을 때 경영을 해냈으나, 멕시코에서는 지주한테 팔고 거기에 다시 농업 노동자로 들어가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토지혁명은 쉽게 성공하지 못합니다. (25쪽)
구약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 비록 작은 나라지만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는 강소국 (强小國)이었다는 말 아닙니까? 왜 강소국이냐? 전부가 주인이고, 전부가 자기 땅을 가지고 있고, 처자식이 있으니까 왜[외]적이 쳐들어오면 목숨 걸고 싸웠거든요. 노예들은 차라리 나라가 무너지기를 바라는데 노예들 중 누가 목숨 바쳐 싸우겠습니까? (26쪽)
그래서 대한민국의 소작농이 모두 자영농으로서 새 나라의 국민이 됩니다. 완전한 새 출발이지요. 그 사람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십시오. 대한민국이 '나의 나라'에요. (33쪽)
전 국민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필리핀이나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그런 우연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에 바로 농지개혁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56쪽)
그렇다면 한국은 왜 이렇게 평등하게 농지를 분배했던 것일까? 당시의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서 선심을 썼던 것일까? 저자는 운이 매우 좋았다고 설명한다. 당시에 북한은 이미 토지개혁을 완료했고 북한의 대중은 크게 환호했다.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토지개혁을 약속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으면서 대륙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당연히 남한의 민중들도 동요했다. 미군정은 남한까지 공산주의 세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한은 전체 토지가 아닌 농지만을 분배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적 정치인이었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하고 그 임무를 맡겼다. 조봉암은 합리적이면서도 유연한, 그리고 농민 대중에게 크게 유리한 농지개혁안을 만들었고 이는 국회를 통과했다.
1948년이라는 상황은 중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기 직전입니다. 중국에서 장제스(藏介石) 군대가 타이완으로 밀려나고 있을 때에요. ······ 미국 입장에서 보면 동아시아를 다 넘겨주게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큰일 났다, 일본·타이완·남한에서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농지개혁이 당시에 가장 중요한 인민의 요구이고, 이것을 갖고서 마오쩌둥(毛澤東) 군대가 중국 인민의 지지를 얻어서 장제스 군대를 대륙에서 밀어내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이 동아시아 3국에서 예방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남로당이 토지개혁을 요구해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30쪽)
저자는 역사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뒤얽히면서 다면적이고 역동적으로 흘러간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역사는 이중성이 있고, 다면적이고, 또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인물도 마찬가지고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관점을 인정한다면 대한민국의 탄생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보수, 친미 인사들만 참여했던 것이 아니다. 신익희와 조봉암 같이 진보 세력 중에서 유연성을 갖춘 사람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이 득세하고 있던 당시 국제 정세 덕분에, 제헌헌법은 평등과 사회복지를 강조하면서 상당히 진보적인 성격도 갖추게 되었다.
제87조를 봅시다.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까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바로 이런 조항들과 앞에서 살펴본 사회권과 관련한 조항들을 근거로 학자들은 제헌 헌법이 사회민주주의 요소가 많은 헌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91쪽)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저자는 다면성을 강조한다. 이승만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가장 먼저 주장했다. 때문에 그는 남북 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단독 정부 수립이 현실적인 주장이었다고 말한다. 소련은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미리부터 해왔었고, 광복 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은 이미 단독 정부가 수립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는 것이다.
1946년 6월, 이승만 같은 경우는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정읍 발언입니다. ······ 그래서 무수히 공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분단의 책임을 묻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북한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토지개혁을 한 것은 1946년 2월입니다. 사실상 정부를 세웠습니다. 소련의 의지는 분명하였습니다. 북한에서도 양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 그러니 거기에 대응해서 남한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사실은 현실론이지요. (123~124쪽)
우리는 흔히 김일성의 유일 지도 체제가 1950년대 중반 이후나 이루어지고, 연안파가 숙청된 후에나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해왔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에요. 1946년 7월에 이미 평양에 김일성종합대학이 만들어집니다. ······ 당시 나이 35세 청년의 이름을 딴 국립대학교라니,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김일성은 이미 조선의 스탈린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사진을 보면 이미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고 정치 집회를 합니다. (334쪽)
······ 해방 전에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을 본 후에 조선공작단을 만들고, 그 단장에 김일성을 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35쪽)
저자는 백범 김구도 재조명하고 있다.
송진우 선생은 그다음 날 새벽에 바로 암살당했어요. 아침이 밝기도 전에 자기 집에서 암살당했어요. 나중에 장덕수 선생이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면서 김구 선생에게 대들었다가 한독당 당원들에게 암살당한 것과 비슷합니다.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습니다. (118쪽)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한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인 셈입니다. 등에 칼을 꽂는 이야기입니다. 제헌국회의원들을 죄다, 신익희니 조봉암이니 이런 사람들으리 모두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 단독정부 수립에 가담하는 사람'으로 몰아버립니다. 참으로 대단한 말입니다. 1947년 여운형의 함살과 1948년의 김구의 북행 감행, 그때의 긴박한 상황이 생생하게 전해오십니까? "독립운동해서 양반이 되자!"고 청년들을 설득하던 김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해서 양반이 되고,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귀국하여 뿌듯해하던 황해도 촌놈 백범(白凡)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뒤어어 암살이 되면서, 그리고 이승만이 말년에 부패한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독재를 하다가 쫓겨나면서 아버지를 잃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아버지 같은 존재로 되살아납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두어 번의 미 군정에 대한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승만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르다가, 마지막 순간에 번쩍 정신이 든 듯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 노선으로 급선회한 그는 해방 정국에 흡사 돈키호테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 이제는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이 된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그래서 차라리 아름다운 마지막 행보와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스토리가 그의 고난에 찬 독립운동과 건국 시기의 정치가로서의 무능함에다 마지막 점을 찍어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의 권력투쟁에서의 승리가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승자의 주변에는 파리떼처럼 아첨꾼과 모리배들이 모여들고, 또 승자에게는 이후의 사태 전개에 대한 무한책임이 따릅니다. 반면에 패자에게는 책임이 면제됩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관념적인 지사(志士)들의 안타까움이 집중되면서 역사에는 패자가 더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126~127쪽)
저자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 진영의 관점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비판한다. 누구는 친일파다, 누구는 보수다, 한국은 태생부터 잘못되었다, 한국은 원래 불평등하다, 한국은 친일파 청산이 되지 않았다, 이런 주장들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다면적인 사실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널리 통용되고 공유된 대한민국 역사관 속에서 대한민국의 탄생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친미파인 이승만이 친일파들과 손잡고 세운 단독 정부로 생각한 거지요. 민족의 염원인 통일 정부를 세우지도 못하고, 친일 청산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농지개혁은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는데 남한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하여 실패로 끝나고, 그래서 봉건 잔재가 남아서 남한은 여전히 식민지 반봉건 사회다, 노골적인 식민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신식민지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가 연구를 해보니까 북한의 농지개혁의 구체적인 실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농지개혁을 해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었어요. 맞아요. 지주들에게 무상몰수해서 무상분배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40퍼센트 세금을 거두어 갔답니다. 그러면 지주가 그냥 국가로 바뀐 것입니다. 농민들이 농지를 사고 팔 수도 없고, 그러니 사실은 소유권이 없는 거지요. 그러다가 잘 알다시피 1950년대 중반쯤에 집단농장화를 했어요. 그러니까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빼앗긴 겁니다. ······ 그에 비하면 남한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라고 하지만 소출의 30퍼센트를 5년만 내면 내 땅이 되었습니다. 30퍼센트의 상환이 부담스러워 분배받은 땅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남한과 북한의 농지개혁은 비교 대상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농민의 입장에서 현실을 보지 않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명분을 비교했으니 얼마나 관념적이었던가요? (22~23쪽)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되어 있으며 광복 후부터 근래에 이르는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나는 역사를 거의 모른다. 그래서 모든 장에서 새로운 사실과 관점을 접했다. 역사가 재미있고 유익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객관성은 유연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성과 객관성은 사실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유연한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고 언제든지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바꿀 용의가 있다. 따라서 관념, 선입관, 주관적 인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벗어남을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저자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그가 객관적이었기 때문이며, 이는 1954년생인 그가 그만큼 유연하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