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쓸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쓴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글쓰기는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탕 안 먹었어요."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사탕을 몰래 먹었는지 아이에게 물었다. 만약 아이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이렇게 말한다면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아이가 단호하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말 내용이 같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했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보다 맥락이나 형식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TV에 전문가로 보이는 사람이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와서 "팥으로 메주를 쑨다"라고 하면 믿지만 비렁뱅이 같은 사람이 나와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라고 하면 믿지 않는다. 그래서 방송국의 아나운서나 기자들은 용모가 깔끔하고 정확한 발음을 구사한다. 그들의 전문적이고 객관성 있어 보이는 용모와 태도는 말에 믿음을 준다.
이는 인간이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의사소통에서 말의 내용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표정, 억양, 외모 등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훨씬 더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인류가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표정이나 행동 같은 비언어 수단을 통해 의사소통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생인류나 그 이전의 조상들, 혹은 (그 조상의 조상이 되는) 집단생활을 하는 포유류까지 포함한다면 의사소통에 언어를 쓴 기간은 최근의 매우 짧은 시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의 유전자가 몸짓, 표정, 억양으로 소통하는 데에 더 익숙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문제는 이러한 비언어적 의사소통 수단이 악용될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사기꾼들은 그럴 듯한 태도와 용모, 말투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인다. 이들은 내용보다도 그것이 담긴 그릇을 잘 꾸미기만 하면 사람들이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글에서도 글이 담고 있는 의미인 '내용'보다 문체나 문장력과 같은 '형식'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잘 정돈된 문장들과 참신한 표현들, 전문용어와 깔끔한 문단 구성을 통해서 "팥으로 메주를 쑨다"라고 주장하면 믿음이 간다. 그러나 별 어려운 단어도 쓰지 않고 어수선한 문장들로 "콩으로 메주를 쑨다"라고 하면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문장력이 좋은 글을 읽을 때 더 긴장해야 한다.
글의 형식에서는 글쓴이의 욕망이 드러난다.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한 글에서는 글쓴이가 자신을 전문가로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특정한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읽게 되고 그로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멋지고 참신한 표현을 많이 쓴 글에서는 글쓴이가 유명해지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많은 작가들이 유명세를 원하며 그것이 글을 쓰는 큰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 욕망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욕망이 글의 진실성을 압도하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욕망이 너무 크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쓰고 있는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쓰고 있는지도 모른채 멋진 표현과 말쑥한 문장들을 짜내는 데 몰두하게 된다.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특이한 이야기를 멋지게 해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글쓰기는 '어떻게 쓸 것인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그것을 '글을 쓸 것인가'와 '무엇을 쓸 것인가'에도 적절히 할애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아이가 사탕을 몰래 먹고서도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눈동자 한 번 흔들리지 않고 "사탕 안 먹었어요!"라고 말한다면 매우 슬플 것이다. 천진(天眞), 세상의 참됨을 머금고 있어야 할 아이가 사람을 속이는 기술을 먼저 배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