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知圖)

나는 왜 한국인을 신뢰하지 않는가

Binaural 2019. 6. 17. 23:34

  외국 가수들이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나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한국 팬들은 공연장에서 호응을 매우 잘해준다.” 한국 팬이든, 일본 팬이든 공연장에 찾아갈 정도라면 그 가수를 좋아하는 마음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 팬들이 공연장에서 더 반응이 좋다고 이야기할까? 한국 팬들이 공연에서 느낀 감동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감정표현을 더 잘하는 사람이 있듯이, 감정 표현을 더 잘하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또는, 한국 전통문화에서 국악의 비중을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이 더 흥이 많거나 음악을 더 좋아한다는 설명도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개운치가 않다. 나또한 공연장에 갔을 때 관객들의 열광이나 노래 따라부르기에서 열정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약간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과연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진심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공연에서 관객이 느낀 만족감이 70%일 경우, 다른 나라 팬들은 70%에 해당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한국 팬들은 마치 100%의 감동을 느낀 것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한국 팬은 가수를 의식한다. 그들은 자신이 팬이나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는지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다. 내가 조금 덜 만족했다고 박수를 덜 쳐주면 가수가 나를 포함한 관객을 안 좋게 평가할까봐 두렵다. 그래서 스스로의 감정에 걸맞은 행동을 하기보다는 평가자를 의식한 행동을 하게 된다. 두 번째로 한국 팬들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의식한다. 한국 팬들은 공연장에 모인 군중 속에서도 소속감을 느낀다. 그들에게 집단 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그러하고 회사에서도 그러하며 공연장에서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는데 나만 혼자 치지 않으면 왠지 눈에 띌 것 같다. 그들에게는 집단 안에서 소외되지 않는 것이 자신의 감정에 떳떳하고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잘 따라한다. 결국 일부 관객이 주도하는 열광적 분위기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편승한다. 이런 주장이 좀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집단의 분위기에 쉽게 동조하는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

 

  요즈음은 한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경우가 꽤 잦다. 천만 명이 봤다는 사실에 '역시 그럴만 해'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영화들도 있다. 백만 명, 아니 십만 명이 봤다고 해도 과대 평가되었다고 느껴지는 영화들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영화에 대한 취향이나 평가 기준은 다르다. 그러나 천만 명이 본 영화라면 몇 백만 명이나 몇 십만 명이 본 영화와는 다른 특별한 재미, 혹은 매력이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보편적으로 보았을 때,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었으리라 예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예상에서 벗어나는 영화도 있다. 오래전에 보았던,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한 영화는 모든 면에서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천만 명이 넘게 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어이가 없었다. 속은 느낌, 그리고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이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불만이나 불쾌감을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화가나고 허탈했다. 이러한 영화에 천만 명의 관객이 몰린 것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보도하고 있는 언론과 대중매체들은 또 뭘까. 사람들은 그저 분위기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영화가 상영관을 장악하고, 방송과 인터넷에서 보도가 되고, 주변 사람들이 보고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그 영화를 안 봤다”라고 말하거나 “앞으로도 관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괴짜, 유별나고 잘난 척하는 사람, 혹은 아웃사이더로 여겨질 것이었다.

 

  한국에는 독특한 회식문화가 있다. 회식 자리에서는 시종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흐른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2차, 3차를 가기도 한다. 늦은 시간, 회식이 끝나고 낮은 직급의 '우리들'만 남으면, '다들 늦게까지 고생했다', '어서 집에 가자'는 뉘앙스와 분위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마치 다들 몇 시간 동안 힘들게 연극을 하고 난 후의 무대 뒷편의 배우들 같다. 우리가 나눈 대화와 웃음,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많은 술병들까지, 모두 대본의 일부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일상생활을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의 이유가 자신의 선호나 감정, 혹은 윤리나 당위성이 아닌, ‘분위기나 대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분위기나 대세’가 생각보다 일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쉽게 조작되기도 한다. 그래서 분위기나 대세만 믿고 어떤 기대나 추측을 했다가는 배신당하거나, 재산이나 건강상의 손해를 보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나를 포함하여, 한국인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신뢰란 어떠한 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큰 예측과 높은 기대감이다. 이러한 예측과 기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예측의 대상이 사람인 경우, 내가 그를 겪으면서 알게 된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지식과 감정들이 예측과 기대의 근거가 된다. 지금까지의 행적, 언행, 태도, 성격 등으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예측을 한다. 그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경우, 그는 나에게 신뢰성이 있는 사람이 된다. 예측의 대상이 사회나 세계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회나 세계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세상은 어떠하다', '만물은 이렇게 변화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한다'와 같은 지식과 감정들이 그 예측의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것들을 상식, 윤리나 도덕, 혹은 당위라고 부른다. 예측이 실현되면 그 사회는 신뢰성이 높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상식과 윤리, 당위에 기반한 예측과 기대가 자주 빗나가는 사회다.

 

  여기에 한 의사가 있다. 우리는 의사란 질병과 부상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치료해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사들에게는 병들고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치료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당연히' 나의 고통에 공감하고 나를 치료해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기대한다. 이러한 예측과 기대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라는 의사라는 직업의 정의(定意)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상식과 당위성에 근거한 기대이자 예측이다. 그런데 만약 한 의사가 나의 건강과 안위보다도 자신의 수입과 병원의 경영을 먼저 생각한 나머지 나에게 치료하지 않아도 되는 충치에 수십 만원 짜리 시술을 권유한다면 이러한 예측은 틀리게 된다.

 

  그 의사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저기 경쟁 병원은 생기고, 경영은 어렵고, 직원들 월급도 주려면 천사처럼 진료를 할 수만은 없다. 또한 주변의 다른 의사들도 그렇게 진료한다면 크게 나쁜 행동은 아닌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병원의 생존만이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주변의 다른 의사들과 만나고 교류를 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이다. 병원이 갈수록 곤궁에 처하게 되어 의사 사회에서 자신이 낮은 평가를 받고 뒤쳐지는 것은 두려운 일일 것이다. 그에게도 자신이 속한 나름의 맥락과 분위기가 있다.

 

  여기에 한 판사가 있다. 우리는 그가 판결을 내릴 때, 외부의 압력이나 판사의 사적인 이익이 재판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어떤 직종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판사를 신뢰한다. 그는 장사꾼이나 정치인이 아니잖는가. 우리는 그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판사는 '공정하게 정의를 판가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예측과 기대를 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하고 상식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러한 예측과 기대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판사들이 처한 나름의 맥락과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맥락은 독재정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조직에서 가장 높은 분의 의중에 따라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잇따르고 있는 재심들, 그리고 과거의 수장을 재판해야 하는 판사님들의 난처함을, 우리는 긴 회식이 끝났을 때의 심정으로 충분히 이해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들의 작은 씨앗들을 교육 현장에서 발견한다. 학생이 장래의 직업을 찾을 때 자기 적성에 맞고 재미도 있으며 자신에게 보람을 주는 직업을 찾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하다. 이 당연함이 당연히 교육과정에 반영되어 의사가 되기에 적합한 아이들이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되기에 적합한 아이들이 판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는 이러한 당위성이 설 자리가 별로 없다. 그 자리를 입시, 경쟁, 성적이라는 ‘분위기나 대세’가 차지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연민이 없는 아이들도 의사가 되고, 정의와는 거리가 먼 아이들도 판사가 된다. 고소득 전문직을 제외하면 지금의 대세는 공무원이다. 어떤 일을 하는 공무원이건, 행정 일이든, 범죄자를 잡는 일이든, 사람을 구하는 일이든, 일단 되고 보자. 학생들은 대세에 편승하는 대가로 진정으로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일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완성하고 세상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할 기회를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아차, ‘자아실현’은 이미 사치, 농담, 혹은 고사성어다. 이것이 분위기이고 대세다. 

 

  국정에 관한 농담같은 이야기가 있다. 여기 어떤 나라에 한 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능력을 평가받은 일은 없었다. 어느 시점부터 그가 점점 신문과 방송에 자주 비치더니 대권 주자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그가 속한 정당 안에서도 그가 대선후보가 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화 된 분위기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지도자로서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춘 사람인가보다.' 이것은 당연한 예측과 기대이다. 일단 그가 속한 정당에서 그는 유력한 대선후보로 여겨지고 있다. 그 정당의 지도자들이나 당원들이 그를 대선후보로 여길 정도라면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나 인성에 대해 인정한다는 의미리라. 만약 그가 아무 능력도 없는 한정치산자 같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유명한 정치인들과 많은 당원들이 그를 대선후보로 추천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또한 언론에서도 그를 대권 주자로 묘사하고 있다. 저렇게나 많은 언론사, 그것도 제일 큰 신문들과 방송에 자주 나오고, 또 저렇게 대권 주자로 불릴 정도라면 그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은 '당연히'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나라가 한국이라면, 이러한 예측과 기대는 일찌감치 접어두는 것이 좋다. 그는 사실 꼭두각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는 누군가가 옆에서 시키는 대로 행사에 참석해서, 시키는 대로 악수를 하며, 시키는 대로 연설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자기 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방송과 신문, 인터넷 상에서 그는 당선이 유력한 수 명의 대선 후보 중 한 명으로 묘사되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 날, 한 방송사는 후보들을 초청해서 토론회를 연다. 그는 상대방의 주장의 요지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자기주장을 논리적으로 펼 줄도 모른다. 어디선가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되풀이할 뿐이다. 자기 정책의 근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는 밑천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는 별 생각이 없다. 그래도 걱정 없다. 대세가 이미 굳어졌기 때문이다. 토론회가 끝나고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다. 그의 지지도는 토론회 전이나 후이나 별 차이 없이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대통령에 당선이 된다.

 

  한국이라면 이런 일이 언제든 가능하다. 한국에서라면, 정당과 언론, 정치 시스템 모두에서 상식과 윤리와 당위를 쉽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정말로 누구든지 주요 정당의 후보만 된다면 시의원,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나라!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란 다 무엇인가? 한 국가의 정당, 언론, 그리고 정치 시스템이 통째로 사기(詐欺)라는 말인가? 또 그를 대통령으로 찍어준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나? 

 

  수백 명이 타고 있는 배 한 척이 천천히 침몰하고 있다. 선장은 승객들이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게 되니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한다. 선장과 승무원은 당연히 승객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크고 사람도 많이 탄 배를 운행하는 선장이니 당연히 그 말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배가 상당히 기울자 해경을 비롯한 구조 인력이 도착하는 것 같다. 이들은 당연히 빠른 시간 안에 우리를 구조해 줄 것이다. 대통령과 모든 공무원들이 나서서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혼신의 힘을 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공무원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해경을 비롯한 구조 인력들은 바다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곧 직업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측하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 직업의 정의(定意)이고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려한 기대와 예측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선장에게도, 승무원들에게도, 대통령에게도, 공무원들에게도, 해경에게도 그러한 기대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곳이 한국이라면.

 

   물론 그들에게도 그들이 속한 맥락과 분위기가 있다. 배에 몇 명이 탓든지, 그 승객들이 학생들이든 간에, 윗분들의 의사가 적극적인 구조활동을 펴지 않는 쪽이라면, 공무원 사회 내에서 그런 태도가 주된 분위기가 될 것이고 그 누구도 거기에 혼자서 대항하기는 어렵다. 괜히 상사의 눈 밖에 났다가는 안 좋은 평가를 받거나 내 승진이 요원해지거나 내 직이 위태로워질 터이다. 가수의 공연에 쉽게 박수를 쳐주듯, 원치 않는 회식에 동조하듯, 투표용지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에게 쉽게 도장을 찍어 주듯, 구조하지 않는 쪽이 대세라면 거기에 동조하는 것이 현명하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일지라도, 그리하여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의심받는다 할지라도.

 

  한국에서는 마트에서 진열대 위에 있는 상품을 구매할 때도 신중해야 한다.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춘, 큰 마트에서 판매되는 상품들은 당연히 안전할 것이다.'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이 구매하고 사용하게 될 상품이니 안정성은 당연히 검증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일만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는 기관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합리적인 예측과 기대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당신은 그 상품을 사용하다가 다치거나 질병을 얻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피해를 입더라도 당신은 오히려 그 상품을 만든 사람들이 처한 맥락과 분위기를 이해해줘야 한다. 그 상품을 제조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시키는 대로 경쟁사보다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상품을 만들어 팔아서 매출액을 올려야만 하는, 그런 분위기에 속해 있었을 뿐이다. 안정성 검사를 한 사람들이나 관리 감독을 하는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남들이 하던 대로, 또는 어제 하던 대로 따라 하면 되는, 그런 집단적 분위기와 맥락에 속해 있었던 것뿐이다. 이러한 맥락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는 곳, 그리하여 그 상품으로 인해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비극과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 나가더라도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곳, 한국은 그런 곳이다. 

 

  처음의 공연장의 예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가수를 의식하고, 주변 관객들을 의식했다. 이를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들은 평가자(혹은 권력자)를 의식한다. 둘째, 사람들은 집단의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한다. 공통점은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평가받는 위치'에 놓이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이 익숙함의 의미를 좀 더 따져보자. 이 평가받는 위치에 대한 익숙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평가자 - 평가받는 자'의 관계일 경우에 그 자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평가받는 자의 역할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자녀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거나, 학교 성적 등을 가지고 비교하는 경우, 자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경우에 비해 자녀의 자존감과 자긍심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그 부모는 왜 자녀를 그렇게 대해야만 했을까? 학교, 대학, 취업에 이르기까지 자녀가 겪어야 할 모든 삶의 과정들에서 지나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부모들은 한국에서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아이에게는 '보통의 평범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불안하다. 그 불안함이 아이들에게도 온전히 전달된다. 그리고 부모 역시도 그렇게 자신을 존중하거나 존중을 받으면서 살아본 기억이 없다. 한국은 소득이 낮거나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중받아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 자녀에게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기는 어렵다. 셋째,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 기준이 필요하다. 평가받는 일에 흔하다는 것은, 항상 이미 정해진 평가 기준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기준, 그리고 사람들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하나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다원성, 다양성의 가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넷째, 평가 자체에 대한 숙고와 비판, 분노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기준을 둬야 하는지를 따지기에 앞서서 평가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누군가는 자기를 평가하는 것 자체를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조차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불쾌감을 표출하는 사람이 적다. 오히려 누가 자신을 쳐다보든, 일단 잘 보이려고만 한다. 한국 사람들은 무엇이든 근원적인 부분을 다루거나 숙고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으며 자기 고유의 생각이 없다. 

 

  어찌보면 한국 사람들은 착하다. 권력자나 다수 앞에서는 착하다. 그런데 그 착함은, 그만큼 집단의 눈치를 보고 그 힘에 복종한다는 뜻도 된다. 즉, 집단이 각 구성원에게 그만큼 폭력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집단의 폭력성도 결국은 집단 구성원들의 숨겨진 폭력성에서 나온 것이다. 또 한국 사람들은 어찌 보면 나약하다. 규범과 분위기에 쉽게 순응하고 만다. 그러나 정해진 규칙 속에서 순위 안에, 합격선 안에 들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는 모습에서는 강인함과 비정함, 그리고 비열함도 목격하게 된다. 착함과 폭력성, 나약함과 비열함,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이 공존하는 것, 그것이 한국인의 특징이고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개성을 표현하면서도 집단생활을 이루어 가기 위해 인류가 내놓은 해결책이 민주주의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미성숙했다. 아직도 생활 속에서는 폭력과 억압, 독재가 난무한다.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회사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 집단을 위해 자신이 희생해도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희생의 이면에는 집단에서 살아 남기 위한 이기심과 생존 본능이 있다. 그 몸부림이 이제는 역겹다. 그 영혼없는 연극이 지겹다. 이제는 반대로 좀 해보자. 너도 집에 가고 싶고, 나도 집에 가고 싶으면, 그냥 집에 가자. 생활 속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각자 자기의 목소리를 내자. 다른 사람인 척 대본을 읽지 말고, 자기의 이야기, 자기의 감정, 자기의 표정을 표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을, 우리 이웃을 신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을 믿어도 되나요?

아니요. 나는 아직 믿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매달리는 그 일이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뱉는 그 말이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약속을 잡은 그 사람이

당신이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인간답게 살아가지 않는 한

당신이 일상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한

무엇보다도 당신이

당신의 삶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수정 : 2023. 7. 14.)